당쟁의 시련이 지은 '최고의 인문지리서'
▲ '영조의 어진'.(세자 시절인 1714년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중환 선생이 살았던 숙종, 경종, 영조 연간은 당쟁이 가장 극렬했던 시기로서, 정권이 교체되는 환국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이중환이 속한 남인 세력은 1680년 경신환국 때 크게 탄압을 받았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다시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 숙종 후반에는 서인 세력에서 분화한 소론 측과 연계하여 경종의 즉위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선생은 영조 즉위 후 고단한 삶으로 빠져들었고 이 삶이 <택리지>를 짓게 된 동기가 되었다.
▲ '영조의 어진'.(세자 시절인 1714년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중환 선생이 살았던 숙종, 경종, 영조 연간은 당쟁이 가장 극렬했던 시기로서, 정권이 교체되는 환국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이중환이 속한 남인 세력은 1680년 경신환국 때 크게 탄압을 받았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다시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 숙종 후반에는 서인 세력에서 분화한 소론 측과 연계하여 경종의 즉위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선생은 영조 즉위 후 고단한 삶으로 빠져들었고 이 삶이 <택리지>를 짓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한 대권 주자는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를 쓰고 토론장에 나왔다. 여기에 역술인을 찾고 빨간 속옷까지 등장하더니 급기야 무속·부적·항문침에 도사까지 매스컴을 오르내린다. 그렇지 않아도 볼썽사나운 정치판인데 이제는 정치를 희화화시켜 개그장으로 만들었다. 원시무속의 힘까지 빌려 대통령이 되려는 마음은 알겠는데, 2021년이라는 이 개명한 세상,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 이야기라 웃을 수만은 없다. 저런 수준의 사람들에게 한 나라를 통째로 맡겨야 한다는 사실에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서글프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저 300년 전 청담 선생은 무속신앙 수준의 산수를 인문지리학으로 그 위상을 높여놓았다. 조선 천재 중 한 명인 최남선이 1912년 조선광문회에서 <택리지>를 간행하며 쓴 글부터 보자.

“이 책은 실제로 겪으며 정밀하게 검토한 데서 나온 것으로 땅으로 사람을 논하고 삶으로 일을 논하고 이로움으로 땅을 관찰하고 땅으로 살 곳을 관찰하였으며 더욱이 사람과 땅이 조화를 이루어 함께하는 부분에 치력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우리나라 지리서 가운데 가장 정요한 것이며 또한 인문지리학의 최초 발명이다.”라 하였다.

최남선의 저 감게 한 주장은 서독에서 개최한 <택리지> 학회 주제가 “최고의 인문지리서 택리지”(경향신문 1973. 2. 27 기사)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제 이중환(李重煥) 선생의 약력을 대략 짚어본다. 선생의 본관은 여주, 자는 휘조(輝祖), 호는 청담(淸潭), 청화산인(靑華山人), 또는 청화자(靑華子)이다. 공주(충남 연기군 금남면 대덕리 일대)에서 살았다.

당색은 북인에서 전향한 남인에 속한 명문가 출생이다. 5대조 이상의(李尙毅)는 광해군 때 북인으로 활약하였고 관직이 의정부 좌참찬에 올랐다. 할아버지 이영(李泳)은 예산현감과 이조참판을, 아버지 이진휴(李震休)는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안동부사, 예조참판,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어머니는 남인 관료 집안인 함양 오씨 오상주(吳相冑)의 딸이다.

선생의 부인은 대사헌을 지낸 사천(泗川) 목씨(睦氏) 목임일(睦林一)의 딸이다. 선생은 이 부인과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이 만남이 선생의 삶을 바꿔놓았다. 선생은 24세인 1713년 증광시의 병과에 급제하여 관직의 길에 들어섰다. 관직 생활은 비교적 순탄했다. 33세에는 병조좌랑(정6품)까지 올랐다. 그해 처가 사람인 목호룡 고변 사건이 일어나 선생은 큰 시련을 맞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노론의 4 대신이 처형되고 노론의 자제들 170여 명이 처벌되는 큰 옥사(임인옥사)가 일어났다.

다음 해인 1723년, 34세에 선생은 병조정랑이 되었으나 처참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해 목호룡의 고변이 무고였음이 판정되면서 정국은 다시 노론의 주도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36세인 1725년에 영조가 즉위하며 선생은 형을 네 차례 받았으나 불복한다. 임인옥사를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일경과 목호룡은 대역죄로 처형을 당하였고, 처남인 목천임과 함께 수사망에 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집안이 남인의 핵심이었고, 노론 세력을 맹렬하게 비판하다가 처형을 당한 이잠(李潛, 성호 이익의 형)의 재종손이라는 점까지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선생은 목호룡의 고변 사건에 깊이 가담한 혐의를 받으면서 정치 인생에 위기를 맞았으나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 곧 석방되었다. 이때 선생은 모두 10회에 걸쳐 국문을 당했는데 “말을 할 수 없다”, “병세가 심하여 정신이 혼미하다”, “병세가 극히 심하여 형을 가할 수 없다”는 기록(<추안(推案)>)으로 보아 혹독한 심문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37세인 1726년(영조 2) 절도(絶島)로 유배길에 올랐다. 38세인 1727년 10월에 풀려나왔으나 12월에 다시 귀양을 간다. 소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바로 그해에 사헌부의 논계(論啓)로 인해 다시 절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후 선생은 30여 년 동안 전국을 방랑하는 불우한 신세가 되었다. 아예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 듯하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책이 바로 <택리지>다.

43세인 1732년 영조는 탕평책으로 남인을 등용하나 이중환에 대한 금고(禁錮, 신분이나 과거의 죄과로 관리가 되는 자격을 제한하거나 박탈하는 제도)는 그대로 이어졌다. 44세에는 부인 사천 목씨마저 사망하였다. 선생 나이 62세인 1751년 <택리지>를 탈고했다. 발문에서 선생은 “내가 황산강(黃山江, 금강의 한 구간) 가에 있었다. 여름날에 아무 할 일이 없어 팔괘정에 올라 더위를 식히면서 우연히 논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택리지>가 완성되자 여러 학자들이 서문과 발문을 썼으며, 많은 사람들이 베껴서 읽었다. 그것은 책의 제목이 10여 종이나 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여주이씨족보>에 의하면 67세인 1756년에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적혀있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 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