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한 정치 벗어나려면 고전 되돌아봐야
▲ <선원보감(璿源寶鑑)>에 보이는 정조 어진. 49세로 사망한 영명한 군주 정조, 정조는 박제가를 ‘견줄 자가 없는 선비’라는 뜻의 무쌍사(無雙士)라 부르고 송나라의 개혁 정치가인 왕안석(王安石)에 비겼으며 검서관으로도 발탁하였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선생이 주장한 이러한 북학을, 정조는 느린 달팽이 걸음만큼도 활용치 못하였다.(<선원보감>은 <왕조실록>에서 역대 왕실 기록을 발췌한 책으로 1931년에 발간되었다. 선원(璿源)은 '아름다운 근원'이라는 뜻으로 왕통을 수식한 말이다.)

“그런 개XX들이, 그런 X들이 무슨 정치를 한다고. ~” 이번 추석의 한 장면이다. 대꾸라도 했다가는 친척계보도가 무너진다.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얼른 자리를 일어났다. 차례를 모시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이 술 한 잔 도니, 제 아무리 코로나 시대라도 자연 정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네 삶과 정치는 불가분이니 새삼스러울 게 없다. 대화가 많을수록 이 나라 민주주의는 전진한다. “민주주의의 최대 적은 약한 자”라고 했던가. 나이와 학력 불문하고 각자 주장은 모두 정열적인 정치학 교수의 강의를 뺨친다. 저마다 나름 이론을 내세워 차기 대선주자까지 꼽는다. 문제는 지지하는 정치인이 동일인이면 괜찮은데, 다르다면 견공(犬公)과 저공(公)이 등장한다. 술 한 잔에 욕 서너 사발을 들이키면 얼굴은 그야말로 벌겋게 달아오른 용광로다. 대통령 선거를 앞에 놓고 여당과 야당이 네 편 내 편 없이 제 이익에 눈이 붉다. 언론이라 불리는 집단도 이에 질세라 제 편 사주(社主) 이익을 위해 '고발사주 의혹'에 '대장동 개발'을 입맛 따라 보도한다. 엎치고 덮치는 이 활극이 2021년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언필칭(言必稱) 난장판이요, 동물농장이 따로 없으니, 이번 추석에 저 앞에 친척계보도가 무너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선생이 살던 시대는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격하는 숭명배청 시대였다. 연암을 위시한 일군의 학자들이 제아무리 뜻을 같이했다 하여도 힘없는 이들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 양반들은 조선 후기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도 숭명(崇明)을 당위적 명분론으로 내걸었고, 글쓰기도 임금에 대한 충성이나 자연 예찬, 혹은 이기니 심성만을 소재로 삼았다. 더욱이 선생은 일개 서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서얼로서 사대부 양반들이 그렇게 혐오하는 청나라로부터 배우자는 논리를 당당히 폈다. 책 이름까지 <북학의>라고 지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학자들은 전연 딴 생각을 갖고 있었다. 선생은 “북학변”에 당대 학자들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지적했다. “북학변”은 '북학'하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기는 당대 학자들을 향한 선생의 변론이다.

“북학변: 하등 선비는 오곡을 보고는 중국에도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다. 중등 선비는 중국의 문장이 우리만 못하다고 하고, 상등 선비는 중국에 성리학이 없다고 한다. 이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중국에는 한 가지도 볼 만한 게 없고 내가 말하는 '중국에서 배울 만한 게 있다'고 하는 것도 있을 리 없다.”

하등에서 상등까지 조선의 양반이라는 사대부 혹은 유학자들은 청나라를 저런 시선으로 보았다. 선생은 지식이나 수단 등 실학은 없이 오직 격물치지(格物致知)니 정심성의(正心誠意, 마음을 바르게 가다듬고 뜻을 정성스럽게 함)이란 주자의 성리학만을 숭상하는 당대 식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마다 정자와 주자의 학설을 말할 뿐, 나라 안에 이단(異端)이 없다. 사대부는 감히 강서(江西)·여요(餘姚)의 학설을 논하지 못한다. 어찌 도가 한 가지에서 나왔겠는가? 과거라는 것으로 몰아치고 풍속으로 구속하여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몸을 용납할 곳이 없고 자손마저 보존하지 못한다.”

'강서·여요의 학설'은 왕수인(王守仁, 1368-1661)의 양명학(陽明學)을 말한다. 왕수인이 여요 지방에 살고 강서 지방에서 벼슬을 해서다. 선생이 말한 대로 양명학은 당시의 대표적인 '이단'으로 배척 대상이었다. 양명학은 조선 유학자들이 신봉하는 주자학과 달랐기 때문이다.

양명학은 세상의 이치를 직접 궁구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고 바로잡음으로써 그곳에서 이치를 밝혀내는 방식이다. 왕수인은 이것을 '심즉리'(心卽理), 즉 마음이 곧 이치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알아내는 격물치지를 내세우며 모든 것을 이치로 파악하는 주자학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선생은 당시 모두가 사악시하는 이 이단 학설인 양명학을 배우자고 한다.

하지만 당시 소위 '유교의 도를 편다'는 학자들은 “오랑캐 편을 든다”고 선생을 멸시하였다. 이런 유자들에게 선생은 위 글의 말미에 “아아! 나를 찾아왔던 모든 이가 장차 유도(儒道, 유교의 도리)를 밝히고 이 백성을 다스릴 사람들인데 그 고루함이 이와 같으니 오늘날 우리 풍속이 진흥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개탄하고 만다.

저 앞에서 언급한 '친척계보도' 운운은 모두 확증적 편향, 일천한 사고, 옳음 아니면 틀림만 있다는 이치적 사고이다. 조개껍데기로 바닷물을 되질하는 짧은 소치에서 비롯한 언행들이다. 이런 까닭은, 백성은 안중에 없이 오로지 저와 제 파당만을 위한 정치(예나 지금이나 그들만의 리그)에서 비롯되었다고, 또 고전을 되새김질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 회부터는 청담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택리지(擇里志)>를 연재한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 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