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부평(富平)은 본디 너른 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곳이다. 부평평야가 말해주듯, 곡창지대로 유명했다. 넓은 농지에서 수확을 많이 내는 풍요로운 평야다. 한강 하류 중심지의 땅이 평평하게 펼쳐쳐 있어 '부평평야'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만큼 농경문화가 널리 발달한 지역으로 꼽힌다. 1914년 부천군 부내면에,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는 등 소속 행정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이랬던 부평이 변신을 꾀한 계기는 1940년 인천육군조병창 문을 열면서다. 그 무렵 계속되는 전쟁으로 일제엔 병기와 군수품 보급이 절실했다. 이때 일본 육군은 조병창 부지로 부평을 선정했다. 부평은 경성과 인천을 잇는 지리적 위치와 공장 부지로 사용할 만한 넓은 터를 갖고 있어 군수기지 조성에 안성맞춤이었다. 인천조병창은 한반도에서 가장 큰 무기제조 공장. 소총·총검·탄환·포탄·군도·차량 등을 생산하며 전쟁 물자를 조달했다. 이곳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들이 위험한 작업에 내몰렸던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망하면서 미군부대가 조병창 자리를 대신했다. 해방 후 미군은 제24군단 예하부대 군수지원사령부(ASCOM)를 조병창과 인근 군수공장 부지에 세웠다. 긴 미군 주둔의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방대한 애스컴 규모를 빗대 미군들은 부평 일대를 '애스컴 시티'라고 불렀다. 미군부대 주변엔 이들을 상대로 한 각종 상권이 풍성했다. 팝송 유행에 인기 가수들을 모으며 서양 음악 산실 역할도 톡톡히 했다. 한국전쟁 이후 부평은 1960년대엔 공업지대로 변모했고, 인구증가를 가져왔다. 1970년대 들어선 주한미군 방위협약에 따라 부평지역 내 많은 병력이 다른 곳으로 단계적 이전을 실시했고, 이후 축소된 미군 주둔 지역엔 '캠프마켓(Camp Market)'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부평엔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자산이 많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담은 '역사적 공간'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부평구는 이달 말까지 보존 가치를 띤 유·무형 자산에 대해 문화유산 지정 신청을 받는다. 구는 이에 앞서 지난해 면밀한 검토를 위해 보존할 만한 자산 42개를 전수조사했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사택과 관사 등 주거 시설이 21개로 가장 많았다. 상업시설 9개와 산업·종교·군사 시설, 일제 강제 징용 노동자 숙소인 영단주택과 검정사택, 부평철도관사, 부평지하호 등도 포함됐다.

부평의 역사적 정체성을 담은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그동안 근현대 문화유산 보존에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을 들은 부평구의 새로운 도전이 기대된다. 아무리 우리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도 미래 후손에게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기를 바라는 소명 의식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