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당시 중앙정보부장) 만큼 평가가 엇갈리고 애매한 경우는 드물다. 우선 사건 경위부터 논란이 되었다. 사건 현장에서 살아남아 유일한 증인이 된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은 김재규 재판 과정과 언론 인터뷰에서 “김재규가 차지철(경호실장)과 언쟁을 벌이다 차지철에게 총을 쐈는데 옆에 있던 박 대통령도 유탄을 맞았다”면서 일관되게 우발적 살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이를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를 뒤집는 결정적 단서가 있다.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 소재 중앙정보부(중정) 안가에서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이 참가한 만찬이 열렸을 때 안가 별관에서는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김정섭 중정 차장보와 식사하고 있었다. 김재규가 정승화를 초대한 뒤 김정섭에게 응접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대통령과의 만찬이 예정돼 있는데 이중으로 약속을 잡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재규는 재판에서 “거사 후 사태 수습을 위해 정 총장을 불렀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김재규는 박정희 시해 직후 정승화가 있는 별관으로 달려갔다. 우발적 범행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풀리지 않는 의혹은 박정희 시해 동기다. 김재규는 재판 내내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혁명”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와 대다수 국민은 인정하지 않았다. 공작정치와 인권유린을 일삼던 기관(중정)의 수장이 민주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정권욕에 눈이 멀어 대통령을 살해한 파렴치범”이라고 발표했다.

김재규 재판은 1979년 12월4일 시작돼(1_2심은 군사법원) 5개월 뒤 1980년 5월20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나흘 뒤인 24일 형이 집행됐다. 박정희 사후 실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재판을 속전속결로 진행시켰다. 때문에 10_26사건은 재판 과정에서 실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다. 안동일 변호사는 “사법 사상 가장 큰 오점을 남긴 재판”이라며 “1심은 2주 만에 끝났고, 사형이 선고되자마자 집행됐다”고 말했다.

특이한 것은 강신옥 변호사의 평이다. 그는 “세월이 흐르면 김재규는 안중근 의사처럼 여겨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해 동기를 떠나) 철옹성 같았던 유신체제를 단번에 무너뜨린 점에 비중을 두면 아주 뜬금없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아직 모호하다. 역사학자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김재규는 죽기 전 “역사가 하는 4심에서는 (내가)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규 재판이 졸속이었다는 점은 재야_재조 법조인 모두 인정한다. 김재규가 죽은지 41년 됐다. 사건의 실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흔히 말하는 진상규명과 과거사 정리 차원에서 재심을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