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는 수모 다시 겪지 않으려면 역사 배워야

 

▲ 박제가 초상화. 이한철(李漢喆, 1808~?)이 그렸다. 이한철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제자이다. 추사가 선생의 제자이니, 제자의 제자가 그린 초상화다. 이한철은 왕의 어진을 그린 화사이다. 이 초상화는 선생 사후에 그려졌으니 김정희에게 선생의 얼굴 모습을 구술받아 그려졌으리라 추측된다. 선생은 자신을 “물소 이마에 칼날 눈썹을 지녔다”고 하였는데, 구술받아 그려서인지 영 마뜩지않다.
▲ 박제가 초상화. 이한철(李漢喆, 1808~?)이 그렸다. 이한철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제자이다. 추사가 선생의 제자이니, 제자의 제자가 그린 초상화다. 이한철은 왕의 어진을 그린 화사이다. 이 초상화는 선생 사후에 그려졌으니 김정희에게 선생의 얼굴 모습을 구술받아 그려졌으리라 추측된다. 선생은 자신을 “물소 이마에 칼날 눈썹을 지녔다”고 하였는데, 구술받아 그려서인지 영 마뜩지않다.

한 대선 주자의 '점령군(占領軍)' 발언을 두고 정치권이 시끄럽다. 딱하다. 1945년 9월7일, 맥아더 포고문 제3조에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 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occupation)'에 대한 모든 반항 행위 혹은 공공의 안녕을 방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을 할 것이다.”라 분명히 명시되었다. 이런 모욕을 다시는 당하지 않으려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이 나라를 위해 정치를 하겠다는 국회의원들이요, 더욱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들이다. 일제식민지, 미군정의 신탁통치를 감내한 현대사조차도 모르고 '미국의 은정에 무례를 범했다'는 저 정치꾼들이나,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흉물스레 침묵을 지키는 일부 언론도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역사가 E. H. 카의 말처럼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여야 한다. 그래야 미래로 나아갈 것이 아닌가. 이 시절 실학을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런 무참한 역사 인식을 보며 실학을 되짚는다는 게 참 저 이들께 송구하고 면괴스러울 뿐이다.

<북학의> '내 편'이 계속 이어진다.

“한어: 지금 본토 사람 말 중에는 신라 때 사투리가 많다. '서울', '임금'(尼師今) 따위 말이 그렇다. 왕씨가 원나라와 통한 뒤에는 가끔 몽고 말이 섞였는데, '불알'(卜兒, 불알), '불화'(不花, 송아지), '수라'(水刺, 임금의 진지) 따위가 그 예다.

고동서화: 꽃에서 생겨난 벌레는 날개나 더듬이도 향기롭지만, 거름더미에서 자란 놈은 더러운 것을 뒤집어쓴 채 꿈틀거린다. 사물이 본디 이러하듯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름답고 찬란한 비단 속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더러운 먼지 구덩이에 빠져 사는 사람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더듬이와 날개가 향기롭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몇 항목만 추려보았다. 선생은 벽돌 같은 일상의 사물에서 목축과 소, 자잘한 시정 및 한어, 고동서화까지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이쯤에서 선생의 시 한 편 보고 말을 잇자.

“'붉구나!' 한 자만 가지고 毋將一紅字/ 눈앞의 온갖 꽃 말 말게 泛稱滿眼花/ 꽃술엔 많고 적음이 있으니 花鬚有多少/ 꼼꼼히 하나씩 찾아보려믄 細心一看過”

선생의 '위인부령화'(爲人賦嶺花)라는 시다. '붉구나!' 한 자만 가지고 어찌 눈앞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온갖 꽃을 다 말하겠는가. 선생은 꽃술의 많고 적음까지 꼼꼼히 살피며 '눈앞의 온갖 꽃 말 말게'라 한다. 때로는 진리가 한 줌 어치도 안 되는 작은 것에 숨어 있다. <북학의>의 자잘함은 저 시 속에서도 찾는다.

이제 '소'(牛) 항목만 좀 더 깊이 보자. 당시 날마다 소 500마리 정도를 도축한 듯하다. 선생은 다음의 이유로 이것이 문제 있다고 한다.

① 소는 열 달 만에 나서 세 살이 되어야 새끼를 배기에 날마다 500마리씩 죽는 것을 당해내지 못한다. 이러니 갈수록 소가 귀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② 농부들 대다수는 소가 없어 이웃에서 빌리는데 빌린 날짜대로 품을 앗아야 하기 때문에 논갈이 때를 놓칠 수밖에 없다.

③ 소를 도축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소고기가 없어져 백성들이 비로소 돼지와 양 등 다른 동물 축산에 힘쓸 것이다.

선생은 당시 돼지고기가 남아도는 이유도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중에 유통되는 쇠고기 물량이 많아서라고 하였다. 소 도축을 줄이면 자연히 돼지와 양 등 다른 목축업이 성장하게 되고 소가 넉넉하면 농사를 짓는 데 때를 놓치지 않는다는 게 선생의 견해다. 1970년대 초반까지 시골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선생의 저 말에 동의를 안 할 수 없다.

이제 '외편'으로 들어간다. 17항목인데, 선생은 상공업과 농경 생활에 관한 삶의 기초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내용은 주로 중국을 본받아서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놀고먹는 유식 양반과 서얼제도에 대한 지적이었다. 선생은 상공업에 대해 다른 실학자들보다 뚜렷이 앞선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내편'처럼 역시 몇 항목만 추려본다.

“거름: 중국에서는 거름을 금같이 아끼고 재를 길에 버리는 일이 없으며 말이 지나가면 삼태기를 들고 따라다닌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안에서 나오는 분뇨를 다 수거하지 못해서 더러운 냄새가 길에 가득하며 냇가 다리 옆 석축에는 사람 똥이 더덕더덕 붙어서 큰 장마가 아니면 씻기지 않는다.

농잠총론: 우리나라 시골 백성들은 1년 내 무명옷 한 벌도 얻어 입기 힘들고 남자나 여자나 일생 침구를 구경하지 못한다. 짚자리를 이불 삼아 그 속에서 자식을 기른다. 아이들은 열 살 전후까지 겨울, 여름 할 것 없이 벌거숭이로 다니며 세상에 버선이나 신이 있는 줄 모르기가 예사다.

과거론 1: 시골 고을에서 보이는 평범한 과시에도 답안을 바치는 자가 곧잘 천 명을 넘어서고, 서울 대동과(大同科, 왕이 친히 참관하는 시험)에서는 유생이 곧잘 수만 명까지 이른다. 수만 명이나 되는 많은 응시자를 두고 반나절 사이에 합격자 방을 내걸어야 하므로 시험을 주관하는 자는 붓을 잡고 있기에 지쳐 눈을 감은 채 답안을 내버린다. 사정이 이 지경이므로 아무리 한유가 과거 시험을 주관하고 소식이 문장을 짓는다 해도 번개같이 답안지를 넘길 테니 소식의 글 솜씨를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아아! 당당한 선비를 선발하는 자리가 도리어 제비뽑기 놀이 재수보다도 못한 형편이니 인재를 취하는 방법은 정말 믿을 수 없다.…(과거장에) 유생이 물과 짐바리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힘센 무인도 들어가고 심부름하는 종도 들어가며 술장수도 들어가니 과장이 어찌 비좁지 않으며 어찌 난잡하지 않겠는가.…과거제도를 바꾸는 방법은 첫째는 문체이고, 둘째는 주관하는 고시관이고, 셋째는 과거장을 잠그는 것이다.”

거름 지적도 날카롭지만, 난장판이 된 과거장문을 아예 잠그자는 주장이야말로 서늘하다. 실례를 보면 정조 24년 1800년 3월에 치러진 경과정시에서 세 곳의 시험장에 입장한 사람이 물경(勿驚)! 11만1838명이었고, 거두어들인 시권만 3만8614장이나 되었다. 저 답안지를 어떻게 채점해야할지 그야말로 기함할 노릇이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