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1905~1944)은 인천의 '문화 인물'이다. 서양 미술과 미학(美學)을 국내에 처음 전파하고, 한국의 미(美)를 집대성한 일로 유명하다. 한국 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우현이 바로 한국 근대미술의 출발인 셈이다. 그는 중구 용동에서 태어나 창영초교와 서울의 보성고보를 거쳤다. 일찍이 우리나라 곳곳에 스민 아름다움을 알고 경성제대(서울대 전신) 예과에서 홀로 미술사를 전공했다. 졸업 후 우현은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해 11년간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 사람이, 그도 만 서른이 안 된 이가 부립박물관 관장을 맡기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정도로 우현은 이미 독보적인 학문 세계를 이룩했다.

그가 규정한 '한국미의 특징'은 지금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성의 계획', '구수한 큰 맛'이 그것이다. 우현은 타계하는 날까지 전국 유적지를 누비고 다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 '고려의 불사(佛寺) 건축', '조선 탑파개설' 등 한국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수많은 논문을 썼다. 우현은 “경주에서 문무왕의 유적을 찾아보라”는 유언을 제자들에게 남겨 문무왕 수중릉 발굴 작업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우현을 제대로 보는 일은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것과 비견할 수 있다.” 지난 2013년 5월 우현 고유섭 전집(10권) 완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이기웅 열화당 대표가 한 말이다. 그만큼 우현이 이뤄낸 학문적 성과가 엄청나다는 얘기로 들린다. 마흔살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남긴 많은 글은 후학들에게 거듭 읽힌다. 새얼문화재단은 1992년 천재적 삶을 산 고유섭을 '제1회 새얼문화상' 수상자로 정해 기리며, 인천시립박물관 앞마당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최원식 전 인하대 교수(국문학)는 동상 건립문에서 “우현 동상 제막은 우리 인천사(史)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이정표이고, 인천의 명예와 자존심의 표상이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한국 미학의 초석을 닦은 우현의 업적이 크지만, 고향 인천엔 그를 기리는 작은 기념관조차 없다. 그래서 미술을 전공한 한 독지가가 지난해 우현 생가 인근 5층 상가건물을 사들여 우현기념관·전시실·교육 실습실 등을 꾸몄다. '우현문(又玄門) 갤러리'로 탄생한 건물은 우현 추모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한다. 지난달 26일엔 우현 기일을 맞아 그의 추모비가 서 있는 생가 터 용동 큰우물 앞마당에서 추모제를 열기도 했다. 아울러 우현문 갤러리에선 우현의 삶과 업적을 소개하는 기념관을 만들기 위해 인천 출신 원로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릴레이 전시가 2년 동안 열린다. 우현을 공부하는 모임도 꾸려지고, 우현 생가 주변 카페와 식당 등이 함께하는 미술제를 기획하는 등의 활동도 본격화한다.

호(又玄)와 이름(裕燮)처럼 신비롭고도 불꽃과 같이 살다 간 한국 미술사의 '큰 별'. 우현을 새롭게 만나는 일이 후학은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갔으면 한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