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두 노동자, 온몸으로 130여 년 인천항 역사를 짊어지다


개항장에 육체노동자 '모군' 모여들자
1887년 관리·배치 기구 '응신청' 신설
최초로 노동자 조직화…부두노조 뿌리

1924년 정미·선미여직공조합 등 망라
인천노동총동맹 만들어 노동운동 전개
일 자본가 차별·횡포에 파업으로 맞서

1945년 10월25일 인천자유노조 창설
유경원 조합장 외자선 입항 이끌기도
1948년 대한노총인천연맹항만위 통합
6·25전쟁 때 와해됐다 부두노조 재건

1980년 출범 인천항운노조 명맥 이어
1987년 노조원 인항고교 설립 앞장서
▲ 응신청 검찰(檢察) 김정곤이 모군 업무 외에도 '자제교육'을 위해 모금 운동을 펼쳐 소학교(제녕학교)를 설립한 바, 그 금액이 300∼400원(元)에 달했다는 내용의 1904년 6월2일자 황성신문 기사. 검찰은 흔히 일컫는 '십장'을 말하는 것으로 응신청 노동자들을 지휘 감독하는 자이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응신청 검찰(檢察) 김정곤이 모군 업무 외에도 '자제교육'을 위해 모금 운동을 펼쳐 소학교(제녕학교)를 설립한 바, 그 금액이 300∼400원(元)에 달했다는 내용의 1904년 6월2일자 황성신문 기사. 검찰은 흔히 일컫는 '십장'을 말하는 것으로 응신청 노동자들을 지휘 감독하는 자이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제국신문 1904년 11월9일자 기사로 역시 응신청 검찰 김정곤이 오늘날의 중구 전동에 소재한 김유근의 집에 유아들 접종을 위한 우두소(牛痘所)를 설치했다는 내용이다. 김정곤은 교육, 빈민구제 등에도 솔선한 인물이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제국신문 1904년 11월9일자 기사로 역시 응신청 검찰 김정곤이 오늘날의 중구 전동에 소재한 김유근의 집에 유아들 접종을 위한 우두소(牛痘所)를 설치했다는 내용이다. 김정곤은 교육, 빈민구제 등에도 솔선한 인물이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28년 7월5일, 인천항의 종선(從船) 사용료 인하에 따라 종선인부들의 삭전도 인하한다는 방침에 따라 노동자 1200명이 연대해 종 파업에 돌입함으로써 작업 중이던 인부들까지 동정 파업을 벌였다는 중외일보 보도 내용이다. 이처럼 인천항 부두노동자들은 임금 문제로 종종 파업 투쟁을 벌였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28년 7월5일, 인천항의 종선(從船) 사용료 인하에 따라 종선인부들의 삭전도 인하한다는 방침에 따라 노동자 1200명이 연대해 종 파업에 돌입함으로써 작업 중이던 인부들까지 동정 파업을 벌였다는 중외일보 보도 내용이다. 이처럼 인천항 부두노동자들은 임금 문제로 종종 파업 투쟁을 벌였다./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35년 일본인들이 설립한 인천곡물협회가 김정곤의 영신조(永信組)를 비롯한 인천항 부두노동자 7개 조(組)를 배제하고 곡물협회 소속처럼 되어 있는 내선조(內鮮組)에만 곡물 하역을 배정함으로써 노동자 5000여명이 전면 파업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기사를 6월13일자 조선중앙일보가 보도한다. 사진은 영신조 사옥 앞에서 파업 중인 노동자들 모습./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35년 일본인들이 설립한 인천곡물협회가 김정곤의 영신조(永信組)를 비롯한 인천항 부두노동자 7개 조(組)를 배제하고 곡물협회 소속처럼 되어 있는 내선조(內鮮組)에만 곡물 하역을 배정함으로써 노동자 5000여명이 전면 파업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기사를 6월13일자 조선중앙일보가 보도한다. 사진은 영신조 사옥 앞에서 파업 중인 노동자들 모습./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어깨걸이, 혹은 등짐을 진 채 노동자들이 하륙작업을 위해 선박과 육상에 걸쳐 놓은 발판, 혹은 족판(足板)이라고 불린 널을 건너고 있다. 나쁜 기상 조건하에서 외항의 선박으로부터 목숨을 건 하역작업도 부두노동자들은 예사로 묵묵히 견뎌냈다./사진제공=한국항만연수원 인천연수원
▲ 어깨걸이, 혹은 등짐을 진 채 노동자들이 하륙작업을 위해 선박과 육상에 걸쳐 놓은 발판, 혹은 족판(足板)이라고 불린 널을 건너고 있다. 나쁜 기상 조건하에서 외항의 선박으로부터 목숨을 건 하역작업도 부두노동자들은 예사로 묵묵히 견뎌냈다./사진제공=한국항만연수원 인천연수원
▲ 1950∼60년대 인천항 화물 운반 작업광경이다. 노동자들이 곡물 가마나 밀가루 포대를 어깨에 지고 우마차에 옮겨 싣는 등 태반이 격심한 육체노동이었다./사진제공=한국항만연수원 인천연수원
▲ 1950∼60년대 인천항 화물 운반 작업광경이다. 노동자들이 곡물 가마나 밀가루 포대를 어깨에 지고 우마차에 옮겨 싣는 등 태반이 격심한 육체노동이었다./사진제공=한국항만연수원 인천연수원
▲ 응신청의 모군꾼으로부터 130여 년의 세월 동안 숱한 곡절을 견뎌 이룩한 보금자리 인천항운노조 건물 전경이다./사진제공=인천항운노조
▲ 응신청의 모군꾼으로부터 130여 년의 세월 동안 숱한 곡절을 견뎌 이룩한 보금자리 인천항운노조 건물 전경이다./사진제공=인천항운노조

모군, 모군꾼은 공사장 같은 데서 삯을 받고 품팔이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지금은 사어(死語)나 다름없이 거의 쓰이지 않아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개항 후에는 공사판뿐만이 아니라 부두에서 일하는 노동자까지도 통칭 모군으로 불렀다.

 

개항장에는 많은 상품이 선적, 하역되기 때문에 이를 담당할 부두 노동자들이 필요하였다. 부두 노동의 종류는 짐 부리기(하륙), 두량하기, 짐 꾸리기, 운반하기 등으로 이를 담당하는 노동자들을 하륙군, 두량군, 칠통군, 지계군으로 불렀다. 하륙군(下陸軍)은 선박의 화물을 싣고 내리는 일을 하는 자이고, 두량군(斗量軍)은 미곡의 분량을 계량하고 포장하는 자이고, 칠통군(七桶軍)은 선박과 부두 사이에서 화물을 싣거나 내리는 노동을 하는 자이고, 지계군(支械軍)은 육상에서 화물 운반에 종사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들 부두 노동자들을 통칭하여 모군(募軍)이라고 불렀는데, 일시적 노동을 위하여 모집된 임금을 받는 노동자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미숙련 육체노동자들이었다.

 

인용문은 ‥인천광역시사… 권2에 나오는 내용으로 부두 노동자, 곧 모군의 담당 업무를 세세하게 분류해 놓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일시적 노동을 위하여 모집'된 '전체적으로 미숙련 육체노동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끌어 모은 비조직적인 노동자들임을 알 수가 있다.

신태범 박사의 ‥개항 후 인천 풍경…에서 보듯, 개항 초기 '제물포에 모여든 사람은 대부분 수건을 질끈 동여맨 상투머리에 무명바지저고리를 입고 감발을 친 발에 짚신을 신은 장정들'이었을 뿐이지, 그 어떤 조직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때 이 장정들을 관리하고 부두 노동에 배치하는 기구로 중구 내동 167번지에 응신청(應信廳)이 생긴 것이다. 일명 모군청(募軍廳)으로도 불렸는데, 이에 대해 최성연 선생은 '막대하게 소요되던 노동력을 공급하고 구전을 받았으며, 노동자들의 합숙소를 겸하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고 ‥개항과 양관 역정…에 기록하고 있다.

응신청의 설치에 대한 공식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1924년 8월호 ‥개벽… 50호 잡지에 실린 기사 ¨인천아 너는 엇더한 도시〃에서 그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仁港이 열닌 후 거금 28년 전 丁亥에 花島鎭別將 겸 인천 경찰관으로 재임하얏든 金宏臣은 當港에 무역이 나날이 왕성함을 따라 船場募軍의 蝟集함을 보고 徐應道, 金德弘 2인에게 等牌의 任을 주어 일본인 各組의 船募軍을 모도와 京畿廳과 嶺南廳을 設하야 경기청에서는 下陸業을 맛고 령남청은 斗量業을 맛하 以來 관청의 감독을 밧아 오다가 다시 23년 전 壬寅 秋에 兩廳을 합하야 응신청으로 개칭한 후 現 永信祖長 金貞坤 씨가 그때부터 廳權을 잡고 잇다가<하략>

 

이 글에서 응신청은 1887년, 인천항 경찰관 김굉신이 서응도, 김덕홍 두 사람에게 감독권을 주어 경기청, 영남청 두 개의 청을 설치해 부두 하역 일을 조직적으로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김굉신은 인천항 감리 밑에서 조계(租界)와 관련한 각종 사무나 운송 업무 등을 보조하던 인물이었다.

이후 1902년에 이 두 청을 통합해 응신청으로 개칭한 후 그 권한을 김정곤이 잡았으나, 1910년에 김정곤의 영신조 외에 영남 사람들의 인신조(仁信組), 그리고 영신조에서 분파된 일신조(日信組) 등 3개조로 나뉜다. 이 외에도 당시 인천항에는 '푼빵[分房]'이라고 불리는 지게꾼들의 임시 조직이 5~6개 정도 있었다고 한다.

응신청은 이처럼 3개의 조로 갈라져 사라지고 말지만, 인천항 최초로 부두 노동자들을 조직화 한 기구로 기록된다. 물론 응신청에 이어 분파된 영신조 등의 역할이란 것이 부두 작업권 확보, 조원들의 임금 문제에 머문 최소한의 초보적인 것이었지만, 후일 인천항 부두노조를 태동시킨 뿌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인천항 부두 노동자들이 겪어온 숱한 곡절과 조직 변천의 역사를 세세하게 다 기술할 수는 없으나, 1923년에 결성된 소성노동회(邵城勞動會)와 이듬해 이를 확대해 결성한 인천노동총동맹(仁川勞動總同盟)은 인천노동사에 획을 긋는 중요한 노동단체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조직은 인천항 부두 노동자를 위시해 정미직공조합, 선미여직공조합 등을 망라한 범노동운동의 주체로 일인 자본가의 차별과 횡포에 파업으로 대항했으며,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두 달여 후인 10월25일, 인천 최초의 한국인 유도사범이었던 유창호(柳昌浩)의 주동으로 율목동 대화숙(大和塾) 자리에서 인천자유노동조합(仁川自由勞動組合)이 창설된다. 특히 자유노동조합의 3대 조합장 유경원(劉京元)은 6·25전쟁 직전인 1950년 6월15일, 미국 ECA측과의 담판을 통해 빈사(瀕死)의 인천항에 외자선(外資船) 입항을 이끌어낸 인물임은 훨씬 앞의 이야기에서 밝힌 바 있다.

자유노동조합은 1948년 4월10일에 결성된 인천부두노동조합(仁川埠頭勞動組合)과의 알력과 대립 끝에 대한노총인천연맹 항만위원회(大韓勞總仁川聯盟港灣委員會)로 통합된다.

6·25전쟁으로 인천항의 노조는 와해되었다가 1951년 3월, 조직을 정비하면서 인천부두노동조합(仁川埠頭勞動組合)으로 재탄생한다. 부산에 피난했던 전 항만위원회 사무국장의 복귀와 역시 부산에 피난해 있던 인천항 소속 부두노무자 300여명의 귀환이 부두노동조합을 탄생시켰음도 이미 앞의 글에서 기술한 바 있다.

이후 노동조합은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면서 4·19와 5·16 등 사회·정치의 격변을 거치며 전국부두노동조합 인천지부(全國埠頭勞動組合仁川支部)로 변화한 데 이어 1980년에 인천항운노동조합(仁川港運勞動組合)으로 출범하여 오늘에 이른다.

따져 보면, 개항 직후 등짐을 지고 어깨걸이를 하던 응신청의 맨몸 모군꾼으로부터 현대화된 인천항운노조의 오늘까지 실로 130년이 넘는 긴 역사가 흐른 것이다. 그것은 일제의 차별과 압제와 수탈에 맞서 싸우며, 때론 굶주림과 위험 보장이 없는 작업환경과 과도한 육체노동의 고통 속에서도 꿋꿋이 지켜온 인천항의 역사일 것이다.

근래에 들어 노조는 항만 하역의 기계화로 생존의 위협을 받기도 했으며, 때로는 귀족노조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었다. 그러나 안팎의 갈등, 알력, 분규를 슬기롭게 해결하면서, 인천항과 시민 사회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으로 '발전, 인천항!' 건설을 위해 애써 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오늘의 인천항이 있게 한 원동력이자 인천항의 당당한 주역들,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이 도크 안벽(岸壁)에 얼룩져 있음을 넘실거리는 저 황해 물결은 기억하리라.

한 가지, 1903년 무렵, 인천항의 가난한 아동들을 위해 설립된 인천 최초의 민간 사립학교인 제녕학교(濟寧學校)의 운영 중심에는 응신청의 막대한 자금 염출이 있었으며, 1907년 폐교 직전의 학교를 김정곤이 교감으로서 사재까지 털어가며 응신청 산하 학교로 유지하려던 그 정신이 1987년, 인천항운노조원들에게 이어져 마침내 인항고등학교를 세우게 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