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입성 전 대통령 직접 설계한 사저 리모델링
6·15남북공동선언 21주년 맞아 역사문화공간 재탄생
메모·안경 등 76개 유품과 거동불편해 단 계단손잡이 고스란히
거물인사 드나들던 응접실…옥고의 터·비밀벙커 눈길
▲ 가장 큰 사진은 6·15 남북공동선언 21주년을 맞아 개관한 경기도 고양시 김대중 대통령 사저 기념관 내부 모습이다.
▲ 가장 큰 사진은 6·15 남북공동선언 21주년을 맞아 개관한 경기도 고양시 김대중 대통령 사저 기념관 내부 모습이다.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평화를 외쳐 온 시간, 21년.

얼어붙은 한반도는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햇볕이 들었다. 일평생 민주화와 평화를 염원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담대한 여정을 따라 한국 현대사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걸었다.

▲ 김 전 대통령 사저 전경.
▲ 김 전 대통령 사저 전경.

#햇빛로 95번길 34-12

지난 15일 6·15 남북정상회담 21주년을 기념해 고양시가 김대중 대통령 사저 기념관을 개관했다. 지난해 3월 고양시가 김 전 대통령의 측근인 재미사업가 조풍언씨로부터 매입한 뒤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통일 비전을 전하는 역사문화공간으로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현 사저는 김 전 대통령이 1996년부터 청와대 입성 전인 1998년까지 2년여 기간을 지낸 곳으로 직접 설계해 지은 공간이다. 463㎡(140여평) 규모의 사저는 복층으로 지어진 본채와 단층으로 지어진 별관까지 모두 2동의 건물로 한옥의 건축 양식을 띠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대개 전남 목포와 서울 동교동을 드는데, 고양의 사저는 보다 특별한 의미가 담겼다. 고양시 정발산동, 도로명 주소로는 햇빛로인 김 전 대통령의 고양시 사저는 평소 김 전 대통령이 염원하던 통일을 기원하며 남북의 길목인 이곳을 택했다.

▲ 외국에서 온 거물급 인사들이 드나들며 토론과 대담을 벌이던 '구국의 응접실'.
▲ 외국에서 온 거물급 인사들이 드나들며 토론과 대담을 벌이던 '구국의 응접실'.

사저 내에는 김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쓰던 집기, 가구, 안경, 펜 등 30종 76개의 유품을 그대로 남겨 보존하고 있다. 유품은 김 전 대통령의 3남 김홍걸 국회의원을 통해 시에 전달됐다. 또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 국가기록원으로부터 옥중서신, 메모, 연설문, 대통령의 생애가 담긴 사진 자료들을 기념관 곳곳에 전시하고 있다.

▲ 김대중 대통령 사저 기념관 '옥고의 터'.
▲ 김대중 대통령 사저 기념관 '옥고의 터'.

#신념이 든 기와집

녹음 짙은 무더운 날씨가 여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린다. 하늘에 떠다니는 뭉게구름은 기념관을 향하는 길을 한층 설레게 했다. 2000년 6월15일 그 날도 그러했으리라.

16일, 조용한 전원주택단지 골목을 따라 오르다 보면 서양의 건축 양식을 따르는 전원주택들 속에 한옥으로 지어진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명패에 새겨진 함자를 보고 특별한 표식 없이도 김 전 대통령의 사저임을 알게 했다.

▲ 김대중대통령기념관 마당에서 열린 개관 기념 사진전.
▲ 김대중대통령기념관 마당에서 열린 개관 기념 사진전.

대문을 걷고 마당에 들어서자 개관 기념 사진전이 한창이다. 김 전 대통령의 생애와 업적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사진으로 전시가 이뤄지고 있다.

기념관은 본채와 별채로 나누어진다. 본채 방문에 앞서 김 전 대통령이 지향해 왔던 평화, 인권, 민주주의의 가치관을 소개하고 있는 별채를 먼저 찾았다.

별채 공간에는 김 전 대통령의 전 생애와 업적 연보를 사진과 함께 설명해 두고 있다.

이어 본채는 실제 김 전 대통령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존해 보여준다. 착용했던 신발이나 안경, 액세서리 하나까지도 전시하고 있다. 거실의 한가운데로 소파가 눈에 들어온다. '구국의 응접실'로 이름 붙인 이곳은 외국에서 온 거물급 인사들이 드나들며 토론과 대담을 벌이던 역사적인 공간으로 소개하고 있다.

실제 이 장소에서 IMF 직후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됐다고 한다.

또 방문객들이 많았던 만큼 다이닝 룸인 '외교의 방'에는 당시 쓰이던 식기나 가전, 식탁 등이 그대로 놓여있다. 이희호 여사가 직접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며 외교의 장으로 적극 활용된 공간이다.

눈에 띄는 점은 주방에 설치된 승강기와 오븐레인지다. 승강기는 지하에서 대기하던 경호원들에게 음식을 전하기 위한 용도였다고 한다. 또 오븐레인지 역시 귀빈들에게 다양한 요리를 대접하기 위해 이희호 여사가 직접 미국에서 들여왔단다.

▲ 독서광으로 알려진 김 전 대통령의 서재.
▲ 독서광으로 알려진 김 전 대통령의 서재.
▲ 이희호 여사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낸 생일 축하 카드가 김대중 대통령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 이희호 여사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낸 생일 축하 카드가 김대중 대통령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김 전 대통령이 생활하던 서재나 침실 공간은 2층에 자리 잡고 있다. 2층으로 가기 위한 계단에는 손잡이가 있는데 이는 평소 거동이 불편했던 김 전 대통령을 위해 특별히 장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활하던 공간에는 김 전 대통령의 살아생전 신념이 잘 묻어나는 듯했다.

특히 이희호 여사를 향한 각별한 애정과 국사를 고민해 온 김 전 대통령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특히 서재에 놓인 열람대에는 수 백권의 도서가 진열돼 눈길을 끌었다. 평소 독서광으로 알려진 김 전 대통령답게 대통령 당선 이후 청와대로 3만여 권(추정)의 책을 옮겼다는 후문이 전해지고 있다.

▲ 김대중대통령기념관 내 상영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 김대중대통령기념관 내 상영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 김대중대통령기념관 비밀공간 중 하나인 투사의 방.
▲ 김대중대통령기념관 비밀공간 중 하나인 투사의 방.

또 한편에는 슬라이드 필름에 담긴 김 전 대통령의 젊은 시절 모습도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시 내려와 지하로 내려간다. 지하에 들어서면 진풍경이 펼쳐진다. 지하로 이어진 계단 끝에 '군홧발에 짓밟힌 민주화의 봄을 향해 먼 길을 떠나다'라고 적힌 문구가 가슴에 내려꽂힌다. 지하 공간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때의 전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옥고를 치를 당시를 재현해 이희호 여사와 주고받던 옥중서신 등을 공개하고 있다.

▲ 서가를 가장한 비밀통로로 지하 벙커로 연결되어 있다.
▲ 서가를 가장한 비밀통로로 지하 벙커로 연결되어 있다.

김대중 대통령 기념관에 가장 흥미로운 점은 곳곳에 숨겨진 비밀 공간들이다. 사저를 매입하면서 외부로 이어진 지하벙커가 발견되기도 했다. 또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서가를 가장한 비밀 통로 등도 재미나게 느껴진다. 반면 김 전 대통령이 겪어왔을 탄압과 군부 독재 앞에 숨어지내야만 했던 비참한 현실,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의 공포가 만들어낸 공간 같이 느껴져 이내 마음이 저릿해진다.

지하실 한쪽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죽는 것이 두렵지만 살기 위해 타협하면 역사와 국민들로부터 영원히 죽게 된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사진제공=고양시청·연합뉴스·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