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이 천하지대본인 세상서 상업을 외치다
▲ 가람문고본 <북학의> 상 표지. <북학의>는 내·외 편으로 2권 1책이다. 내 편은 수레(車)·배(船)·성(城)·벽돌( )·수고(水庫)·기와(瓦)·자기( )·삿자리( )·주택(宮室)·창호(窓戶)·뜰(階 )·도로(道路)·교량(橋梁)·목축(畜牧)·소(牛)·말(馬)· 나귀(驢)·안장(鞍)·구유통(槽)·시장과 우물(市井)·장사(商賈)·은(銀)·화폐(錢)·철(鐵)·목재(材木)·여자의 의복(女服)·연극(場 )·중국어(漢語)·통역(譯)·약(藥)·장(醬)·인장(印)·담요(氈)·저보(邸報)·종이(紙)·활(弓)·총과 화살(銃矢)·자(尺)·문방구(文房之具)·골동품과 서화(古董書畵) 등 30항목으로 구성되었다. 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구와 시설에 대한 개혁론을 제시해 현실 문화와 경제생활 전반을 개선하려 하였다.
▲ 가람문고본 <북학의> 상 표지. <북학의>는 내·외 편으로 2권 1책이다. 내 편은 수레(車)·배(船)·성(城)·벽돌( )·수고(水庫)·기와(瓦)·자기( )·삿자리( )·주택(宮室)·창호(窓戶)·뜰(階 )·도로(道路)·교량(橋梁)·목축(畜牧)·소(牛)·말(馬)· 나귀(驢)·안장(鞍)·구유통(槽)·시장과 우물(市井)·장사(商賈)·은(銀)·화폐(錢)·철(鐵)·목재(材木)·여자의 의복(女服)·연극(場 )·중국어(漢語)·통역(譯)·약(藥)·장(醬)·인장(印)·담요(氈)·저보(邸報)·종이(紙)·활(弓)·총과 화살(銃矢)·자(尺)·문방구(文房之具)·골동품과 서화(古董書畵) 등 30항목으로 구성되었다. 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구와 시설에 대한 개혁론을 제시해 현실 문화와 경제생활 전반을 개선하려 하였다.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은 사회가 원시공동체에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로 진화하고 발전한 결과로서 필연적이다.” 마르크스의 사적유물론(私的唯物論) 요점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반복으로 간주하고 그 바탕은 경제로 보았다. 따라서 하층계급이 상층계급을 타도함으로써 평등하게 된다는 것을 역사의 필연이라고 단언한다.

마르크스의 주장이 더 이상 설자리를 잃은 이 세계에서 이에 대해 시비를 가릴 이유는 없다. 다만 저이의 계급투쟁 반복 요인이 ‘경제’라는 데는 뼈저리게 동의할 수밖에 없다. 18세기 이 경제에 독특한 관심을 집중한 실학자가 바로 선생이다. 선생은 서얼이었지만 살림살이는 조금은 여유로웠던 듯하고 물질에 대한 집착도 꽤 있었던 듯하다.(하지만 선생은 “늘 가난하였다”라 하였으니 자신의 살림살이를 영 못마땅히 여긴 듯하다.) 이덕무의 <간본 아정유고> 권6, 문(文)-서(書), ‘이낙서 서구에게 주는 편지’를 보면 선생의 물질에 대한 의식이 자못 짭짤하다. “내가 단 것에 대해서는 마치 성성(__)이가 술을 좋아하고 원숭이가 과일을 즐기는 것과 같으므로 내 친구들은 모두 단 것을 보면 나를 생각하고 단 게 있으면 나를 주곤 하는데 초정만은 그렇지 않소. 그는 세 차례나 단것을 먹게 되었는데, 나를 생각지 않고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이 나에게 먹으라고 준 것까지 수시로 훔쳐 먹곤 하오. 친구 간 의리에 있어 허물이 있으면 규계하는 법이니, 족하는 초정을 깊이 책망해주기 바라오”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덕무가 아홉 살이나 위요, 같은 서얼로서 사검서요, 연암 선생에게 배움을 같이하는 사이 아닌가. 하기야 한골나가는 양반 중, 양반인 연암 박지원조차 제자인 선생에게 돈과 술을 좀 꾸려다가 된통 망신을 당하기도 한 것을 보면 말이다. 이때 연암은 “꼴같잖게 막돼먹은 놈!”이라 욕을 해댔다. 이렇든 저렇든 선생의 경제관이 독특하게 배어있는 책이 바로 <북학의>다.

선생은 당시에 농업이 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인 세상에 상업을 중시하였다. 실학자들 중, 선생보다 앞선 중상주의로 패러다임을 재구조화한 인물은 토정 이지함(1517-1578)이다. 토정은 관직에 나가서까지도 농업이 아닌 염업, 수공업 등을 통한 부민정책을 꾀했다. 이후 중농주의자이면서도 상업을 예사롭게 보지 않은 유수원(양반의 상업 종사 환영), 박지원(<허생전>을 통해 상업과 해외 통상 인정) 등이 있고 선생이 그 뒤를 잇지만, 학문으로는 가장 깊다.

선생은 국내 상업과 외국 무역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에 그의 사상도 당시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도시 상공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 즉 조선 후기 실학이다.

정인보의 <담헌서> ‘서’에는 선생의 스승과 학문에 관한 서술이 있다. 선생 주변 인물로 위로는 유형원에서 홍대용, 김원행, 이익, 박지원, 정철조, 그리고 정약용까지 보인다. 유형원을 제외하면 모두 근기실학자들이다. 실학을 지역성으로 굳이 따지면 서울을 중심으로 한 근기실학(近畿實學)과 전라도 중심의 호남실학(湖南實學)으로 나눌 수 있다. 호남 실학자로는 유형원과 신경준_위백규_황윤석_양득중(梁得中, 1665-1742)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양득중은 <덕촌집>(德村集)을 지었는데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를 주창하였다. ‘실사구시’라는 용어는 <한서>,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 보인다.

선생의 학문은 실학이었다. 선생은 신분제도에 반대하는 선진적인 실학사상을 전개하였다. 유형원과 이익 등의 토지경제사상을 지양하고 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선생은 상공업의 발전을 위하여 국가는 수레를 쓸 수 있도록 길을 내어야 하고 화폐 사용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중상주의적 국가관을 내세웠다.

<북학의> ‘서’에서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개 쓰임을 이롭게 하고 생을 두텁게 하는 데(利用厚生) 있어, 하나라도 빼놓는 게 있으면 위로는 올바른 덕(正德)을 해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백성을 가르쳐야 한다”하였고, 관중은 “의식이 풍족해야 예절을 안다”고 하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북학의>(北學議)를 읽어본다. 연암은 <북학의> ‘서’에 아래와 같이 써놓았다. 자신의 저술인 <열하일기>와 <북학의>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내용이다.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재선(在先, 박제가)이 그가 지은 <북학의> 내편과 외편을 보여주었다. 재선은 나보다 먼저 북경에 갔던 사람이다. 그는 농잠, 목축, 성곽, 궁실, 주거로부터 기와, 대자리, 붓, 자(尺) 등을 만드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헤아리고 마음으로 비교하지 않은 게 없었다. 눈으로 보지 못한 게 있으면 반드시 물어보았고,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 게 있으면 반드시 배웠다. 시험 삼아 책을 한번 펼쳐 보니, 내 일록(日錄, <열하일기>)과 더불어 조금도 어긋나는 게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았다. 이러한 까닭에 그가 진실로 즐거운 마음으로 나에게 보여준 것이요, 나도 흐뭇이 여겨 3일 동안이나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 이게 어찌 우리 두 사람이 눈으로만 보고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진실로 비 뿌리고 눈 날리는 날에도 연구하고, 술이 거나하고 등잔불이 꺼질 때까지 토론해오던 것을 눈으로 한번 확인한 것뿐이다.”

‘북학’이란 <맹자>에 보인다. <맹자> 등문공 상(_文公 上)에 “진량(陳良)은 초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주공(周公, 주나라 왕조를 세운 문왕의 아들이며 무왕의 동생으로 유학자들이 성인으로 받듦)과 중니(仲尼, 공자)의 도를 좋아한 나머지, 북쪽으로 중국에 와서 학문을 배웠다”(北學於中國)라 하였다. 선생이 이 북학을 따 제명한 것은 중국(청나라)을 선진 문명국으로 인정하고 겸손하게 한 수 배워보자는 뜻이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