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계의 전설 유상철 인천유나이티드FC 명예감독이 그제 우리 곁을 떠났다.

건장한 체구에 누구든 반갑게 맞을 그의 멋진 웃음은 트레이드마크로 남았다. 그는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한 선수였고 지도자였다. 그래서 그의 영면 앞에 가슴이 저리고 안타깝다. 죽음 앞에서도 편하게 순응하며 웃음 지었을 그의 긍정 에너지가 저 강마저도 행복하게 건넜을 것이다.

그의 포지션은 골키퍼를 제외한 그라운드의 멀티플레이어였다. 혼신의 힘을 다해 승리를 향했던 국가대표였고, 월드컵 역사를 새로 새긴 축구 영웅이다. 우리는 선수시절 유상철을 공격수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K리그에서는 공격수 뿐 아니라 수비수, 미드필더로 베스트 일레븐에 오른 한국 축구의 정상이었다.

그의 플레이는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에서 돋보였다. 폴란드에게 월드컵 사상 첫 승을 거둔 후반 쐐기골의 주인공은 백넘버 6번 유상철이었다. 그는 브라질 히바우두, 독일 미하엘 발라크 등과 대회 올스타 미드필더 부문에 뽑힌 스타였다. 이제 청년으로 성장한 2002월드컵 세대는 투혼의 태극전사, 갈색 장발 유상철을 애도한다. 그의 거뜬한 예후를 기대하지 않았는가. 30대 초반 그의 슛과 환호가 오늘 더욱 아쉽고 그립다. 그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꿈과 희망으로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붉은 악마의 아이콘이었다.

2년 전 그가 인천유나이티드 9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췌장암이란 악성종양과 투병하면서도 그는 감독으로서의 품위와 열정을 잃지 않았다. 때로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근황을 전한 인천과 인천시민을 사랑한 인천인이었다. 쾌유를 기원한 축구팬들의 응원과 메시지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특히 그는 지도자로서의 따뜻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후진 선수들에게 이 시대의 진정한 멘토였기 때문이다. 유 감독의 자연스러운 인간성이었고 각별한 소통의 비결이었다. 유 감독은 2019년 시즌 정규리그 최종전에서 경남FC와 비기면서 1부 잔류를 이끌었다. 인천 축구팬들을 감동의 드라마로 끌어들였다. 병마를 이겨내라는 '남은 약속 하나도 꼭 지켜줘'란 현수막의 공허함을 이제 달랠 길 없다.

그는 감독이기 전에 축구계의 선배였고, 인생의 멘토였다. 상담자로서 지도자로서 부모와 같은 온정으로 선수들의 좌절과 결기를 다독였던 큰 스승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딱딱한 축구선수, 맹렬한 지도자라기보다 인간을 인간답게 사랑한 순수한 인간이었다. 2007년 '날아라 슛돌이' 방송 프로그램에 7살 어린 소년으로 출연했던 스페인 발렌시아 이강인은 그를 진정한 '스승'이라고 애도했다. 유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 지도자로서 존경받는 이유다.

서울 축구 명문 경신고등학교 선수시절 그는 '빨랫줄 슛'을 날리곤 해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를 기억하는 경신고 교직원들은 '후배들의 전국대회 우승을 기원'했던 그가 “터프한 플레이를 구사하지만 공동체의 질서와 배려를 중요시해 신뢰감이 컸다”며 애도했다.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별이 뜨고 별이 졌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인천과 대한민국 축구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영정 속에 파안대소하는 유상철 감독의 50세 인생, 슬픔에 눈물이 난다. 고등학교 후배 유상철 감독의 영면을 기원한다.

 

/김형수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