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극단의 미혹에 휩쓸린 '환영의 노예들'
▲ 영화 '비정성시' 중 폭력조직에 의해 죽임을 당한 큰아들 문웅의 장례식 장면.
▲ 영화 '비정성시' 중 폭력조직에 의해 죽임을 당한 큰아들 문웅의 장례식 장면.

“우리의 팔자는 노예야. 운명이 그렇게 만들었어.”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조국으로의 반환의 기쁨도 잠시, 국민당 정권에 실망한 대만인들은 일제히 불만을 표출한다. 식량과 실업 문제, 물가 폭등 등 대만 주민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있는데도 국민당 정부가 파견한 지방 관료들은 부패와 비리만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정부의 대만인 배척은 가뜩이나 주인자리를 꿰찬 대륙인들에 대한 반감을 극대화시킨다. 문청의 지식인 친구들도 정부를 비판하고 대만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국민당 정부 전복을 역설한다. 그리고 이들의 불만과 우려는 1947년에 일어난 2·28사건을 점화하는 불씨가 된다.

영화 '비정성시(悲情城市)'(1989)는 일제 해방 직후의 대만을 배경으로 대만인과 대륙인의 충돌로 수많은 희생자가 양산된 2.28사건을 다룬 대만 거장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대표작이다. 영화 속 임씨 가문의 3대에 걸친 비극적인 가족사는 1945년 51년간의 일제 식민통치에서의 해방부터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에 패한 국민당의 대만으로의 퇴각까지 파란 많았던 대만 현대사를 관통한다.

 

중도(中道)와 무위(無爲) 사상으로 통찰한 역사의 비극

1945년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운데 임아록의 큰아들 문웅은 초조한 마음으로 조상 위패 앞에 향을 올리며 아내의 순산을 기원한다. 마침내 큰며느리의 진통 끝에 사내아이가 태어나자, 임씨 가문은 대만의 해방과 함께 겹경사를 맞는다. 폭죽소리인지 총소리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항구도시 지롱(基隆)을 배경으로 임씨 가문의 가족사가 전개된다. 임아록은 네 아들을 두었으나, 둘째와 셋째는 일본군에 징병되어 각각 필리핀과 상해로 떠난 뒤 소식이 없다. 뒤늦게 대만으로 돌아온 셋째 문량은 상하이조직의 권유로 큰돈을 벌려고 마약 밀수에 가담하고 큰형까지 폭력조직에 연루되게 만든다. 한편 귀머거리인 넷째 문청은 사진관을 운영하며 친구 관영을 통해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개혁주의자로 변해간다. 이로써 임씨 가문의 아들들은 두 극단의 길로 휩쓸리게 된다. 욕망의 길과 고행의 길, 양 극단으로… 영화는 불교의 중도 사상과 도가의 무위 사상을 통해 대만 현대사를 통찰함으로써 비극의 근본원인을 진단한다. 영화 속 남성들의 세계는 중도를 벗어나 양 극단으로 치닫는다. 조폭들, 정부 관료들은 돈과 쾌락을 좇고, 지식인들은 신념과 이상을 좇는다. 그리고 대만인과 대륙인으로 나뉘어 극렬하게 대립한다. 이처럼 사회가 시비선악(是非善惡)의 양편으로 나뉘어 대립과 갈등으로 나아감에 따라 비극의 불씨가 조금씩 지펴지고 결국 2.28사건이 터지고 만다. 국민당 정부의 대만인들에 대한 과격한 진압과 학살은 수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이로 인해 관영 같은 대만 지식인들의 반정부 투쟁 또한 야기된다. 이처럼 양 극단의 대치는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써 저것이 생긴다”는 연기법(緣起法)의 원리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2500여 년 전 구도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은 진리이다. 즉, 하나의 파동, 하나의 물결, 하나의 날갯짓도 원인이 되어 결국 엄청난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붓다가 깨달은 진리는 노자가 설파한 '무위'의 진리와 맞닿는다. 양 극단의 발생과 대립은 욕망이나 의지에 따라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하려는 유위(有爲)의 행동에 의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임씨 가문에 비극을 안긴다. 문웅은 폭력조직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문량은 친일파 매국노로 몰려 고문당해 폐인이 된다. 그리고 문청은 반정부 활동을 지원하다가 군인들에게 잡혀가 실종된다. 한편 아내 관미는 잡혀가는 순간까지도 가족사진을 현상하며 환영에 집착한 문청과는 달리 어린 아들과 함께 고요히 삶을 영위한다.

노자는 천지만물이 우주의 본질 '도(道)'로부터 탄생하고 '도'로 회귀한다고 역설했다. 다시 말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도'로의 회귀, 즉 근원으로의 회귀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진정한 목표를 망각한 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환영의 세계 속에 갇혀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만 무심결에 따라 부른다. “유랑, 유랑... 언제가 돼야 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나?…”

 

/시희(SIHI) 베이징필름아카데미 영화연출 전공 석사 졸업·영화에세이스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