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1960∼70년대 시골에서는 이따끔 저승사자들이 마을을 덮쳤다. 면사무소에서 나오던 밀주와 산림단속반이다. 동구 밖에 낯선 이들이 나타나면 집집마다 대나무숲 등에 술단지를 숨키느라 난리가 났다. 산림단속반은 더 무서웠다. 생솔가지 등 푸른 잎이 달린 땔감을 집에 두었다가는 경을 쳐야 했다. 이웃동네 한 노인은 생소나무를 베어 장작으로 패 놓았다가 징역을 갔다는 얘기도 돌았다. 그래도 밥 짓고 구들장은 덥혀야 했다. 그래서 '나무 하는 일'은 학교 파한 꼬맹이들의 일과가 됐다. 솔갈비(소나무 낙엽)와 삭정이, 냇가의 갈대 등을 한 지게씩 들여와야 저녁밥을 얻어 먹을 수 있었다. 산으로 가는 길목에는 붉은 글씨의 '입산금지' '산불조심' 입간판이 '00군수' 명의로 서 있었다. 먹을 곡식이 너무 부족하고 산이라고는 온통 벌거숭이던 시절의 풍속화다. 그로부터 60년이 넘도록, 나무나 숲을 건드리는 일을 터부시하는 DNA가 한국인 핏줄에 깊이 새겨졌다.

▶그런 역사를 거쳐 오늘 한국은 세계 4위 산림강국에 올라섰다. 핀란드, 일본, 스웨덴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6.25까지 겪으며 한반도의 산들은 불모지대가 됐다. 1950년대 통계로는 58%가 민둥산 , 11%는 풀 한 포기 없는 산이었다. 1969년의 UN 보고서는 '고질적 산림 황폐로 치유 불가능'이라 했다. 당장의 끼니가 아쉽도록 궁핍했던 때지만 온 국민이 산림녹화에 나섰다. 산림청을 따로 두고 식목일에다 육림의 날까지 지켰다. 세계의 전문가들이 성공 비결을 분석했다. 첫째 고사리 손까지 동참시킨 국가적 리더십, 둘째 한국인들의 적극 참여, 셋째 대체연료의 개발•보급이다. 덧붙여 “아무리 산이 헐벗은 나라라도 한국처럼만 하면 다시 푸르를 수 있다”고도 진단했다.

▶이런 역사의 한국 산림청이 푸르른 산을 민둥산으로 되돌리고 있다 해서 논란이다. 산림관리 차원의 솎아베기나 간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국 곳곳에서 수만평의 숲들을 삭발하듯 밀어버린 것이다. 나무가 30년이 넘으면 탄소흡수량이 떨어지니 3억 그루를 베어내고 어린 나무 30억 그루를 다시 심는다는 것이다. 환경운동연합조차 “90만ha의 숲을 모두 베어내겠다는 것은 탄소중립을 빙자한 벌목 정책”이라 했다. 환경부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논란이 되자 산림청은 “민간 산주가 한 일” “벌목 허가는 지자체에 위임됐다”고 둘러댔다. 벌목도, 식목도 국민세금으로 이루어지는 일인 줄은 국민들도 다 안다. 어린 나무가 더 많은 탄소를 빨아들인다는 이론도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아마존 밀림도 밀어버려야 하냐는 반론도 나온다. 어쨌거나 산림청의 이번 싹쓸이 벌목 정책은 한국인의 뿌리깊은 '산림보호' DNA를 크게 건드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