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속선 띄우니 머나먼 낙도까지 가닿는 시간 70% 단축


1893년 세곡 운송 담당 이운사 설립
1년 만에 폐업…일본우선회사가 경영
인천 기점으로 제주까지 정기적 운항

1953년 11개사 13개 항로 정기 취항
1963년부터 여객선 항로 정비·개설
노후 목선 강선 대체 등 현대화 사업

1970년대 중반 연안부두 건설되면서
객선부두·연안여객 터미널 통합 이전
현재는 육운 불가능 5개 도서만 운항

1970년대 초반 3시간 걸리던 덕적도
요샌 고속 페리선으로 1시간이면 가
14시간 소요 백령도 4시간 만에 도착
▲ 덕적도에 입항하고 있는 최신 크루즈 선의 날렵한 모습. 인천항에서 덕적도까지 1시간의 운항 시간으로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다./사진출처=인천광역시 옹진군 홈페이지
▲ 덕적도에 입항하고 있는 최신 크루즈 선의 날렵한 모습. 인천항에서 덕적도까지 1시간의 운항 시간으로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다./사진출처=인천광역시 옹진군 홈페이지

인천항이 근대적 연안 해운의 시발지로서의 연원은 개항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역사에 대해서는 본 연재 제17화에서 이미 기술한 바 있으나, 당시 인천항이 우리나라 연안 해운의 기점으로서 항로가 광범했던 사실만은 ‥인천항사…를 바탕으로 발췌해 본다.

1886년 정부는 세곡 운송을 위해 설치한 전운국(轉運局)이 백성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자 폐지하고, 1893년에 기선회사 이운사(利運社)를 설립한다. 그러나 이 회사는 재정난으로 1년 만에 폐업하고 일본우선회사(日本郵船會社)에 경영을 맡긴다. 1년여 동안 일본우선이 대리로 경영할 당시 항로는 거의 전국에 걸쳐 뻗쳐 있었다. 화객(貨客)도 실어 날랐지만 세곡 운송 때문에 이렇게 넓은 항로를 가졌던 것이다.

인천을 기점으로 해서 전라도 지방의 군산·목포·여수를 비롯해 경상도의 삼천포·마산·부산·염포·포항과 더불어 함경도 원산·서포·신포·신창·성진·명천·경성 지역들과 제주까지 장거리 항로를 정기적으로 운항했던 것이다.

▲ 객선부두에 도착한 선박에서 하선하는 도서 주민들. 당시는 매일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것이 아니어서 승선하려는 승객들도 한꺼번에 몰려 입출항 시 혼잡을 이루었다. 1950년대 풍경이다./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 100년
▲ 객선부두에 도착한 선박에서 하선하는 도서 주민들. 당시는 매일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것이 아니어서 승선하려는 승객들도 한꺼번에 몰려 입출항 시 혼잡을 이루었다. 1950년대 풍경이다./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 100년

1900년에 설립된 대한협동우선회사(大韓協同郵船會社)의 항로는 인천에서 진남포·만경대·군산·목포·제주·북관이었고, 1901년에 인천 유지들이 창설한 통운사(通運社)는 황해도의 해주·개성·황주와 충청도의 경진·백석포 등으로 비교적 근거리 항로를 가지고 있었다.

종합해 보면, 당시 인천을 기점으로 한 연안 항로는 전국 항포구(港浦口)를 망라해 뻗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천항에 입항하는 선박도 1890년 20척에서 1893년에는 76척으로 증가하는데, 무엇보다 인천항이 우리나라 연안 항운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항로로만 보면 인천을 근거로 한 초기의 해운업이 번창한 듯싶으나, 한국인 경영의 해운회사 속내는 실로 미숙하고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대한협동우선회사는 기선 5척을 가지고 주로 화물 운수를 경영하지만 사운(社運)은 발전되지 못하였다. 소유하는 기선 중 순신·일신의 두 소 기선은 객실의 설비도 있고 인천을 근거로 그 부근을 항행하여 상당한 이익이 있었다. 그러나 한성·현익·창용의 3척은 모두 화물선으로 인천에서 부산을 거쳐 북관지방(北關地方)을 항행하는데 화물을 만재할 때까지는 며칠이 되어도 동일 항에 정박하여 흡사 범선과 다르지 않고 한 항로에 수십 일을 소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협동우선회사는 이익이 많을 때는 이익금을 배당으로 지불하여, 나중에 석탄대 지불 연체로 그 소유선이 일본 문사(門司)의 모 상인에게서 차압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타선과 충돌하는 사고로 다액의 배상금을 지출하고, 1903년 봄에는 인천의 굴구회조점(堀久回漕店)의 기선과 인천·평양 간에 격렬한 경쟁을 시도하여 다액의 손실을 입고 크게 역경에 빠짐으로써 노일전쟁(露日戰爭)의 과정에서 일본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신편 한국사』 42권, 「해운」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초기 한국인 경영의 해운업 실태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이 같은 험난한 역사 위에 오늘의 인천항이 섰음을 돌아보게 된다.

이미 기록한 바 있는 대로 이로부터 20여 년 뒤인 1927년, 우리보다 월등히 앞선 해운 실력과 자금력으로 일본 기선회사들이 연안 항운을 주름잡는 중에도 인천의 연안해운 선구자 유진식(兪鎭植)이 삼신기선(森信汽船)을 설립해 꿋꿋이 맞선 혁혁한 역사도 이어진다.

▲ 1960년대 초반 무렵의 인천항 객선부두. 현 중부경찰서 위치쯤에 잔교가 있어 이곳에서 연안여객선이 출발했다. 시내 학생들이 객선부두를 견학하는 듯하다./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 100년
▲ 1960년대 초반 무렵의 인천항 객선부두. 현 중부경찰서 위치쯤에 잔교가 있어 이곳에서 연안여객선이 출발했다. 시내 학생들이 객선부두를 견학하는 듯하다./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 100년

1932년 들어 인천항의 해운업체는 총 7개 업체로 16개 항로에 취항하는데, 중간의 도서지역 기착지만도 30여 곳에 이른다. 이후 광복을 거쳐 6·25전쟁이 휴전되던 1953년의 통계에는 동양기선 등 11개 선사가 경기만 일대와 멀리 당진·목포·마산 등 13개 항로에 정기적으로 취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63년 3월에는 도서 주민의 교통 불편 해소를 위해 인천∼대부도 간 여객선 취항을 시작으로 연안 여객선 항로를 정비, 개설하면서 노후화된 목선을 강선(鋼船)으로 대체하는 등 여객선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기도 한다.

▲ 1970년대 중반 연안부두가 생긴 이후 인천항 내항에서 이전한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의 잘 정비된 객선 부두 풍경이다./사진출처=인천항만공사
▲ 1970년대 중반 연안부두가 생긴 이후 인천항 내항에서 이전한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의 잘 정비된 객선 부두 풍경이다./사진출처=인천항만공사

1970년대 중반에 연안부두가 건설되면서 현 1부두 북쪽 끄트머리에 있던 객선부두와 월미도 선착장을 이용하던 연안여객 터미널도 이곳으로 통합된다. 현재 이곳 터미널을 기점으로 인천-백령도, 인천–덕적도, 인천–이작도, 인천–연평도, 인천–육도•풍도 간 5개 항로를 운항 중에 있다. 선박도 모두 현대화돼 대부분 고속 페리 선박이다.

1960년대 옛 객선부두 시절, 여름방학이면 덕적도, 무의도 등지에 야영을 가기 위해 지금 중부경찰서 위치쯤에 있던 객선부두 잔교에서 텐트와 취사도구를 꾸려 들고 아침 일찍부터 나가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다 승선하던 추억이 아련하다.

해마다 피서 철이면 이 부두에 승객이 몰려들었다. 배가 출항하기 전에는 으례 선원인 듯한 사람이, 배 위 갑판에만 있지 말고 밑의 선실로 들어가라는 말을 했다. 은근히 겁을 먹고 시원한 바람과 일망무제의 탁 트인 바다 경치를 포기하고 선실로 들어가던 기억도 난다. 요즘 신형 배들은 넓은 객실에다 창문도 조망하기 좋게 환히 열려 있어 앉은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풍광을 즐길 수 있다.

▲ 백령도를 운항하는 코리아 킹 호의 모습. 과거 인천항에서 20시간이나 걸리던 백령도 뱃길은 오늘날 이 같은 고속 페리호 운항으로 4시간 정도면 가 닿는다./사진출처=고려고속훼리(주) 홈페이지
▲ 백령도를 운항하는 코리아 킹 호의 모습. 과거 인천항에서 20시간이나 걸리던 백령도 뱃길은 오늘날 이 같은 고속 페리호 운항으로 4시간 정도면 가 닿는다./사진출처=고려고속훼리(주) 홈페이지

첫 기억은 1960년, 중학 1년 여름방학에 '머나 먼 덕적도' 서포리에 가던 일이다. 아침 9시를 조금 넘겨 옛 부두를 떠난 30여t의 목선은 숨 가쁘게 통통거리며 낮 2시 무렵이 다 되어서야 겨우 서포리 선착장에 닿았다. 참으로 멀었다. 요즘 운항하는 쾌속선으로는 불과 1시간이면 넉넉히 닿을 물길을 이렇게 오래도록 간 것이다. 하기야 1970년대 초반에 들어서도 3시간이나 소요되었으니, 선박의 규모나 운항 속도 모두가 뒤처져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인천항에서 직선거리 192㎞라는 백령도 역시 과거에는 무려 20시간이 넘는 고역의 항로였다. 당시는 3박4일마다 출항하는 낙도 보조항로로, 1970년대 초반에 들어서 순항 시간이 14시간, 후반 무렵에야 12시간 정도로 이때까지도 승객들은 숱한 시간을 무료하게 물 위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섬에 들어가는 사람은 빠져나올 날을 기약할 수가 없다. 3박4일을 예정하고 간 사람이 1∼2주일을 묵게 되는 것은 아직도 이곳 사람들의 상식으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일기불순이 주원인이다. 연중 약 70일간은 해무(海霧)가 섬을 가리게 마련이며 나머지는 비바람 치는 날이 쉴 새 없다고 한다. 한 번 드나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이곳을 왕래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안다.

1973년 12월14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르포 기사를 부분 발췌한 내용이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런 지경이었던 백령도에 1996년부터 쾌속선이 취항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하루에 두 편이나 운항한다. 한나절도 채 걸리지 않는, 불과 4시간이면 가닿는다.

▲ 인천항을 기점으로 한 6개 연안 항로 중의 하나인 육도·풍도 항로를 운항하는 서해누리 페리호의 모습./사진출처=대부해운 홈페이지
▲ 인천항을 기점으로 한 6개 연안 항로 중의 하나인 육도·풍도 항로를 운항하는 서해누리 페리호의 모습./사진출처=대부해운 홈페이지

옛날과 달리 오늘날은 육운(陸運)이 불가능한 도서지방 5개 항로만을 운항하고 있으나, 인천항을 기점으로 한 연안항운은 이렇게 거친 파도를 헤치고 아득한 수평선을 넘어 발전해 왔던 것이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