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밍은 마부를 뜻하는 그룸(groom)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마부가 말을 돌보고 손질하는 것을 뜻하는 그루밍(grooming)이 범죄와 연관되어 사용될 때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길들여 조종하거나 폭력을 은폐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루밍 피해자들은 자신이 피해를 당하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가해자를 보호자로 착각하고 폭력과 착취를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2018년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전쟁 종식과 평화 공존을 선언하고 군사적 적대행위의 중단을 약속하면서 한반도는 희망에 들끓었다. 그 약속대로만 하면 우리 민족은 평화와 통일의 벅찬 노정을 함께 걷게 된다. 그러나 남측은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시간만 끌다가 북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3년이 흘렀다. 올해도 한미연합군사훈련으로 북을 자극하고 말았다.

민족의 일을 독자적으로 결정하여 추진하지 못하고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한미 관계는 그루밍 상태와 다름없어 보인다. 한미 관계에서 우리는 미국에게 조종당하는 것은 아닌지, 피해를 당하면서도 피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미국을 보호자로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심각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루밍은 대개 여섯 단계로 진행되는데 피해 대상자 물색, 신뢰관계 맺기, 피해자의 욕구 충족시키기, 피해자 고립시키기, 착취 관계 형성, 통제 유지가 일반적인 순서라고 한다. 한반도를 아시아 지배 전략의 요충지로 물색한 미국은 이와 같은 단계를 거쳐 지금은 통제 유지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미워킹그룹 신설 등 한반도 평화를 방해하는 미국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광화문의 대규모 집회에서 성조기를 흔들면서 한미동맹 강화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미국은 남측에 대하여 신뢰관계 맺기에 성공했다.

미국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한국이 어려울 때 밀가루 등 물적 지원을 해 준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미국은 한때 그렇게 한국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서 지금의 관계를 만들어 온 것이다.

미국의 은혜에 취해 있다 보니 자주적인 외교 관계를 펼치지 못하고 고립되고 말았다. 그저 미국이면 만사가 오케이다. 그러나 안으로는 착취 관계가 형성되었다. 터무니없는 미군 주둔비 요구도 그렇고, 주한미군 범죄에 대해 제대로 항변도 못하는 처지가 그렇고, 값비싼 미국 무기를 구입해야 하는 형편도 그렇다. 객관적인 눈으로 보면 착취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착취로 여기지 못하는 것이 그루밍 상태와 꼭 닮아 있다.

정상적인 관계가 아님을 깨닫는다고 해도 그루밍 상태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이미 통제 유지 단계에 와 있기 때문이다. 통제 유지에는 회유와 협박이 동반된다. 성착취의 경우 용돈을 더 많이 주는 등으로 회유하고, 사진이나 동영상을 유포한다는 등으로 협박한다. 이쯤되면 두려워서라도 침묵하면서 학대를 받아들이게 된다.

미국은 한국을 상대로 은밀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회유하고 협박한다. 그런 일들이 간혹 폭로되기도 하는데 지난 2019년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가 이혜훈 국회 정보위원장을 관저로 불러 방위비 분담금 50억 달러를 언급하며 노골적으로 인상을 요구한 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에서 근무한 어느 인사의 말에 따르면 미국이 한국을 하루아침에 주저앉힐 방법은 1000가지도 넘는다고 한다.

피해자가 그루밍 상태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을 되찾으려면 우선 자신이 그루밍 피해자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가족이나 친척 등 믿을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한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선 현재의 한미 관계는 정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누구를 믿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까? 당연히 우리 민족이다. 이제부터라도 미국의 간섭을 단호히 거부하고 북측과의 약속을 과감히 이행해야 한다.

 

/지창영 평화협정운동본부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