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호 내려온 플라스틱
장난감 같아 돌리다 펑
중1때 두 손 잃고 봉변
고작 2000만원 내외 보상
1인 시위로 세상에 전달
▲ 지뢰 피해자 이영식씨가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경성대 사진학과 김문정 교수

# "이 없으면 잇몸으로"

손 없는 두 팔이 능숙하게 휴대전화 메시지를 두들긴다. 대수롭지 않은 듯, 책장도 서슴없이 넘겨댔다. 두 팔에 굳게 박힌 이영식(53)씨의 굳은살이 그간의 고통을 말해주는 듯 했다. 군인이 꿈이던 이씨는 지뢰 폭발로 두 손을 잃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사고를 당했습니다. 당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학업을 보냈었죠. 그렇다 보니 종종 인근의 파로호를 찾아 빨래하곤 했는데 호수 주변으로 끈이 달린 플라스틱 하나가 떠내러 왔더라고요. 장난감인가 싶어 끈을 잡고 쥐불놀이하듯 돌렸는데 그 순간 지뢰가 터지면서 봉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군인을 꿈꿔왔던 이씨는 그렇게도 타고 싶었던 군용 차량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두 손을 잃고 난 뒤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씨가 가지고 놀던 플라스틱은 장난감이 아닌 발목 지뢰였다.

“절망스러웠죠. 신체가 고통스러운 것보다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희망이 사라졌다는 고통이 저를 더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꿈도 희망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죠.”

손이 없는 그의 인생은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끝내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던 이씨는 근근이 농사일이나 허드렛일을 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수십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세를 면치 못한 채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가장 예민할 시기에 놀림도 많이 당했죠. 당시만 해도 장애인은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더했을 테죠. 대다수의 지뢰 피해자들이 위로금이라고 주어진 보상도 2000만원 내외였던 터라 가난을 피하긴 어려웠습니다. 특히 절단 장애인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렇다 할 일자리를 구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씨 본인조차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지뢰폭발피해자들이 고통받는 열악한 현실을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세상과 맞서기로 결심했다.

“지뢰피해사실을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빠지지 않고 전면에 나섰습니다. 지뢰피해자들의 고통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용기를 내지 못하는 수많은 지뢰피해자를 대신해 세상으로 나갔죠.”

4년 전, 민간인 지뢰피해자 지원 특별법이 제정됐으나 대개의 피해자에겐 고작 2000만원 내외가 주어졌다. 60~70년대 임금을 기준으로 책정된 위로금 명목의 보상금은 피해자들에겐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이씨는 피켓 하나 덜렁 목에 걸고 거리로 나왔다.

“1인 시위에 나서게 됐습니다. 비록 양손은 없지만 두 다리가 멀쩡하니 못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었죠. 어디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라면 찾아다녔습니다.”

세상엔 점차 지뢰 피해자들이 외친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비록 아무도 듣지 않는다 해도 어딘가에는 목소리가 전해지길 간절히 기대하며 수많은 지뢰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고 있다.

“세상 밖으로 나오세요. 용기를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모이면 언젠가 반드시 세상이 바뀔 날이 옵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