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다

돌부리에 걸려 개천에 처박힌 적이 있었다

하늘엔 제비가 높이높이 날고,

핸들이 꺾인 자전거가

코뿔소처럼 머리를 들이박고 있었다

 

바람을 너무 많이 넣었군

바퀴의 심장이 터져버렸어

타이어가 찢어진 자전거를 끌어올리며

강진상회 아저씨가 혀를 차며 말했다

 

구부러져 내리는 햇살을 밟고

찢어진 교복에 담겨 걷던 등교길에서

길을 껴안고 있는 돌부리를 보았다

자전거를 밀어낸 건 돌부리의 완력이 아니라

바퀴 내부에 숨죽인 바람의 저항이었다

 

적당히 바람이 빠진 짐자전거에 쌀가마를 싣고

불안하게 그러나 가장 안전하게,

언덕배기를 넘어 쌀 배달 가는 아저씨

둥글게 어깨를 말고 바퀴를 받아넘기는

돌부리들이 눈에 보였다

 

▶사물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삶의 깨달음이 돋보이는 시이다. 자전거 바퀴가 터지는 현상은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사소한 일상에서 주변 사물을 관찰하고 그 사물에 담겨 있는 이치를 캐어내고, 이를 삶의 이치와 연관짓는다. 이 시에서 대비되는 사물은 화자의 자전거와 '강진상회 아저씨'의 짐자전거, 그러니까 바람이 너무 많은 바퀴와 '적당히 바람이 빠진 바퀴', 그리고 바람과 돌부리이다. 여기서 자전거는 자연과 대비되는 문명의 산물이자 인간의 욕망을 의미하고, 바람의 양은 인간의 욕심과 관련된다.

너무 팽팽한 바퀴는 바람과 돌부리의 완력 사이에서 충돌을 일으켜 심장이 터지지만 적당히 바람 빠진 바퀴는 바람과 돌부리가 서로 협력하면서 가장 안전하게 살아가게 한다. 등굣길, 자전거가 터지는 상황에서 시인이 관찰한 것은 욕심이 결국은 대립과 갈등의 부작용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깨달음이다. 그것은 무욕의 삶과 다른 것이 아니다.

무욕이란 결코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욕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끝없이 확장되기만 하는 탐욕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넘치는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 바퀴 내부에 숨죽인 바람의 저항과 돌부리들이 협력하는 이치가 그렇듯이, 자신을 낮추면서(바퀴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바람처럼) 비우면서 살아가는 것이 조화로운 삶의 이치일 것이다.

/강동우 문학평론가 colum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