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한마디로 특혜받는 사람들의 책임이다. 로마시대에 귀족이 전쟁에 참여하는 전통은 확고했다. 로마 건국 이후 500년 동안 원로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15분의 1로 급격히 줄어든 것은 계속되는 전투에서 귀족들이 많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귀족과 왕족은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혜택을 받는 만큼, 책임도 남달라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탈리아어가 아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프랑스어로 그 정신이 대변될까. 진수를 보여준 것은 1347년 프랑스 노르망디 북쪽에 있는 깔레(Calais)라는 항구도시의 특권층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데 프랑스의 최전방인 깔레에 구원군이 오지 않아 영국에 항복하게 됐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깔레시민 전체를 몰살시키는 대신 6명의 지원자가 나오면 그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매듭짓겠다고 했다. 이때 처음 나선 사람이 최고 갑부였던 쌩피에르였고 이어 깔레 시장인 장데르, 고위 성직자 등이 영국왕 앞으로 나갔다. (신용석 전 조선일보 파리특파원 글 참조)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_미국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희생과 솔선수범이 의무인 동시에 명예로 여겨지면서 자발적이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제1차_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고위층 자제들이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명이 전사했고, 6_25전쟁 당시에는 미군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달 미국 최대 온라인몰 '아마존'의 최고경영자(CEO) 베이조스의 전 부인 맥켄지 스콧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어려움에 빠진 취약계층을 위해 42억 달러(한화 4조5969억원)를 기부했다. 스콧이 지난해 기부한 금액은 모두 60억 달러(6조5670억원)에 달한다. 미국에서 갑부가 거액을 기부하는 일은 흔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계층간 대립을 완화하고 공동체 유지를 위한 최고의 수단처럼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도 기부가 자주 이뤄지고 있지만 대개 그 주체가 중산층이다. 딱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불릴 만한 사례는 드물다.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를 실천했던 경주 최부자를 끌어들여야 할 지경이다. 코로나 온정도 특권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서 이뤄졌다.

전쟁사(史)에서도 마찬가지다. 양반 출신 의병장이 다수 등장했지만 밥이나 겨우 먹는 시골 선비들이었다. 대신 조선의 선조와 인조, 6_25전쟁 당시의 이승만과 같이 전쟁이 나면 먼저 도주하기에 바뼜던 부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게 이 나라의 현실이자 역사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다른 나라 얘기다.

송복 전 연세대 교수는 저서 '특혜와 책임'(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우리나라 상류층은 '당신들의 몫까지 국가를 위해 헌신하마'라는 생각보다는 '당신들의 몫까지 빼앗아 살겠다'는 탐욕에 젖어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우리 상류층만큼 천민성이 두드러진 집단은 없다”고 밝혔다.

/김학준 논설위원 k1234@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