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44. 경기남부·충남서부 누빈 정주원 의병장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44. 경기남부·충남서부 누빈 정주원 의병장
  • 인천일보
  • 승인 2020.11.22 16:55
  • 수정 2020.11.22 17:07
  • 2020.11.23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기 정미의병 중 첫손 꼽히는데 휘하 장병 포상 더뎌

일제, 헤이그 특사 빌미 친일파 앞장세워
1907년 7월18일 광무황제 강제퇴위 시키자
다음 달 동지 30여명과 경기 죽산군서 거의

임옥여 의진과 합진해 900여 군세 형성
참위 출신 이상덕 참여 후 수원·당진 진출도
관찰사 보고서에 첫 번째 기재될 만큼 활약
이듬해 4월25일 의진 해산 후 7월19일 피체

종신유형 고초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이상덕·박덕삼·안춘경, 공적 인정 못 받아
▲ 정주원 의병장 전적지 표지(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산면 죽능리 능말 마을 입구).

◆ 광무황제 퇴위와 군대해산에 반발, 거의하다

1907년 7월18일, 일제는 광무황제가 헤이그특사를 파견한 것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고, 그들 앞잡이 이완용·송병준 등을 내세워 '황제 자리를 황태자에게 양위하든지,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왕(메이지)에게 사과하든지'를 선택하라고 윽박지르자 광무황제는 결국 황태자로 하여금 군국대사를 대리할 것을 명한 후 이튿날 물러났다.

“짐은 지금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代理)하게 하노니…” (<조선왕조실록> 1907. 7. 18.)

당시 상황에 대하여 경기관찰사 김사묵은 내부대신 박제순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는데, 한성(漢城)과 경성(京城)을 함께 사용하며, 의병의 봉기를 “배일파(排日派)의 음모·밀책이 치열해졌고, 이에 따라 완고하고 어리석은 인민도 선동되어” 일어난 것으로 파악하였다.

“헤이그밀사 사건은 뜻밖에도 황위선양의 결과를 가져왔으며, 나아가서는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정미7조약-필자 주)을 배출(胚出)케 함으로써 정계의 파란은 바야흐로 높아져 배일파(排日派)의 음모·밀책이 치열해졌고, 이에 따라 완고하고 어리석은 인민도 선동되어 그 기세가 자못 앙진(昻進)하여, 인심의 동요 또한 한층 높아짐으로서 한성(漢城)의 질서는 파괴되어 갔으며 그 기세는 거의 끝이 없어 보였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돌연히 군대 해산의 조칙이 내려졌다.

이에 앞서 경성(京城)의 경비는 일본군대 및 경찰에서 한층 강화하였으므로, 이에 한성의 천지는 소란을 피울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에 경성의 정변(政變) 소식은 지방에 훤전(喧傳)되어 유언비어가 맹렬히 퍼지는 한편, 불온한 무리는 경성에서 뜻을 얻지 못함을 불만으로 생각하여 지방의 우매한 인민을 선동하고 배일적(排日的) 폭동을 함부로 일으키는가 하면, 인민 또한 이에 영합하여 일종의 폭도화(暴徒化)한 집단 단체를 이루어 마침내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폭도사편집자료', <독립운동사자료집> 3. 500~501쪽)

광무황제의 특사로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고자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할복 자결했다는 소식에 이은 비보에 당시 경기도 죽산군 원삼면 하사리(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하사리)에 살던 정주원(鄭周源)은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해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당시 죽산군은 현 안성시 죽산면을 중심으로 안성시의 동부 3개 면(일죽면·죽산면·삼죽면)과 용인시 처인구의 동남부 2개 면(원삼면·백암면)을 관할하던 행정구역이었으니, 경기도 남부와 충청남도 서부지역에 인접한 곳이었다.

▲ 정주원·이상덕 의병장 피체 기록(<폭도에 관한 편책> 1908년 7월27일).
▲ 정주원·이상덕 의병장 피체 기록(<폭도에 관한 편책> 1908년 7월27일).

◆ 경기도 대표적인 의진을 형성하다

정주원의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호는 송운(松雲)으로 아버지 일항(一恒)과 어머니 거창 신씨(愼氏) 사이 4남 1녀 중, 4남으로 1870년(일부 기록 1868년) 충남 당진시 고대면 용두리에서 태어나 1907년 8월 의병을 일으킬 당시에는 경기도 죽산군 원삼면 하사리에 살고 있었다.

정주원이 30여명의 동지를 모아 거의 한 후 양성군(陽城郡), 양지군(陽智郡) 등지에서 150여명을 규합하여 총기·탄약으로 무장하였으니, 규모가 꽤 큰 의진을 형성한 것이었다.

당시 양성군은 현 안성시 양성면·원곡면·공도읍 지역이고, 양지군은 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동부동과 안성시 고삼면 등지였는데, 그 지역에서도 크고 작은 의진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8월25일, 안성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던 비교적 큰 규모의 7개의 의진을 비롯한 많은 소규모 의진이 한데 모여 이른바 '의병회의'를 한다는 소문에 모여든 의병은 1만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정주원을 비롯한 의병장들은 의병투쟁의 방향과 방식에 대하여 논의했는데, 합진하거나 연계투쟁을 벌이고자 한 의진이 있었는가 하면, 독자노선을 고집한 의진도 많아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채 그달 28일 해산되었다. 이때 정주원 의진은 양지군·죽산군 등지에서 활동하던 임옥여(任玉汝) 의진과 합진하고 의병 모집을 전개하니, 얼마 후 900여명 규모의 의진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융희 원년 8월(일자 미상) 자진하여 의병에 투신하고, 당시 용인군 굴암에 있는 30여 명의 지방 무뢰배를 끌고 양지군·양성군을 배회하여 도당(徒黨:의병-필자 주)의 모집에 힘써 150여 명의 당여(黨與)를 얻고 총기·탄약의 준비 또한 갖추어짐으로서 스스로 의병대장(義兵隊長:義兵大將-필자 주)이 되어 부서를 정하고 거병(擧兵)하기에 이르렀다.

8월 25일. 안성에 있어서의 의병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부하를 거느리고 안성시(安城市)에 이르렀다. 이때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7명, 부하 1만 명이 모였다 한다. 그리하여 목적한 회의는 각자 의견이 불일치한 결과 마침내 아무런 의결을 얻지 못하고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회집(會集)의 다음날인 29일 새벽. 일본군 40명의 습격을 받고 교전하였으나, 잠시 후에 궤란패주(潰亂敗走)하였다. 9월 이후 죽산·양지의 양군을 배회, 어리석은 인민을 선동하자 부하로서 투신하여 오는 자가 날로 더하여 한때 9백여 명에 달하여, 이를 세 부대로 나누어, 그 중의 한 부대는 정주원 자신이 인솔하고, 수원군 수하(水下) 방면에 출동하여 겁탈(劫奪)을 함부로 하였으며, 나머지 두 부대는 그 부하에게 인솔케 하여 양지·죽산의 경계에 배치하여 도량(跳梁)이 극단에 달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502~503쪽)

이 기밀문서는 당시 일제앞잡이 경기관찰사 김사묵이 내부대신 박제순에게 보고한 '경비(京警秘) 제428호'(1909. 3. 16.)에 나오는 것으로 1907년 7월부터 1908년 8월까지의 경기도에서 활동한 주요 의병장의 활약상을 정리한 것인데, 여기에는 정주원이 첫 번째로 등장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의 활약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정주원 의병장과 부인 달성 서씨 어울무덤(충남 당진시 송학읍 가학리 산 6-10).
▲ 정주원 의병장과 부인 달성 서씨 어울무덤(충남 당진시 송학읍 가학리 산 6-10).

◆ 1년여 의병투쟁 후 피체되다

정주원 의진은 임옥여 의진과 합진하고, 이어 전 참위 출신 이상덕(李相德)이 의진에 참여하여 소대장을 맡게 되자 의병투쟁은 점점 열기를 더해 갔다.

정주원은 의진을 세 부대로 나누어 자신은 수원군 수하(水下) 방면으로 나아가 수원·안성·양지 등지에서 활약하였고, 나머지 두 부대는 양지·죽산의 경계에 배치하여 활약하도록 하였다.

정주원은 의진의 주된 활동을 살펴보면, 1907년 11월 한진(漢津:현 충남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에서 배를 타고 고온포(古溫浦: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에 건너가 당진주재소를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 2월에 안성·양지·죽산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죽산군 능촌(陵村: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능말 마을)에서 일본군 15명과 교전하였다. 이어 4월 양지군 사동(寺洞)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으며, 용인군 요봉골(料鳳谷: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요봉리)에서 일본군과 교전 끝에 부상자 1명을 내었다. 4월25일 다시 당진으로 건너가 재기를 꾀하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일본군과의 접전이 불가함을 깨닫고 일시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 해 7월19일, 오전 8시경 충남 해미군 적서촌(赤鼠村)에서 2척의 선박으로 입항할 때에 신호(信號)를 오인하여 일본군에게 추격당하게 되자 스스로 의병대장 정주원임을 밝히고 피체되기에 이르렀다.

 

◆ 교수형에 이어 종신유형으로 고초 겪다

정주원·이상덕 의병장은 9월2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정주원 의병장은 교수형, 이상덕 의병장은 유형 15년이 선고되었다.

“경기도 죽산군 원삼면(遠三面) 하사리(荷寺里)

농업 정주원(鄭周源) 39세

충청남도 태안군 하대면(下大面) 운동(雲洞)

농업 전 참위(參尉) 이상덕(李相德) 26세

위 두 사람에게 대한 내란사건에 대하여 검사 이토(伊藤德順)가 관여하고 판결함이 다음과 같다.

 

주문

피고 정주원을 교수형에 처한다.

피고 이상덕을 유형 15년에 처한다.

 

이유

피고 정주원은 한일 양국 정부의 현하 정책에 불쾌하여 의병을 일으켜 그 정치를 변경하고자 융희 원년 9월에 의병을 죽산군(竹山郡)에서 일으켜, 그의 부하 수백 명을 이끌고서 동 2년 5월경까지 일본수비대와 죽산·양지·수원·안성·당진·면천의 여러 군으로 옮겨가면서 싸웠으며, 이상덕은 동 2년 3월경부터 위 정(鄭)의 부하가 되어 그의 소대장으로서 당진·면천의 여러 군으로 옮겨가며 싸운 자다.“

정주원 의병장은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여 11월24일 경성공소원에서 종신유형에 처해졌다. 또한 그의 의진에서 활약하던 의병 중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인물이 많았다. 신현구(申鉉九)는 교수형, 안춘경(安春京)은 징역 7년, 김사근(金士根)·손응현(孫應鉉)은 징역 5년, 송교원(宋敎源)은 징역 3년, 박덕삼(朴德三)은 징역 2년, 이상덕은 유형 15년이 선고되어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정주원 의병장의 공적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으나 2020년 11월 현재 이상덕 의병장과 의병 박덕삼·안춘경은 아직도 포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