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동구 송현배수지의 제수변실.

수도국산은 6•25 전쟁의 난민과 공장 노동자 빈민을 함께 품어 주었던 야트막한 산이다. 원래 이름은 송림산인데 수도국 시설(배수지)이 들어서면서 '수도국산'으로 불렸다.

필자는 그 산 바로 아래 동네에서 태어난 후 스물 한 살까지 살았다. 철조망이 높게 둘러처져 있었던 수도국산에는 정복 차림의 경비원들이 24시간 보초를 섰다. 남파 간첩이 몰래 배수지에 침입해 물탱크에 독약을 타면 인천시민의 절반이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곳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잡히면 '가막소(감옥)'에 가야 한다고 동네 어른들은 늘 엄포를 놓았다.

1906년 4월 대한제국은 임시로 수도국을 설치하고 서울 노량진에서 인천 송현동 배수지까지 송수관 공사를 했다. 30㎞의 송수관은 경인철도를 따라 파묻었다. 4년 걸린 공정은 지금으로 말하면 인천대교 건설에 버금가는 대공사였다. 1910년 10월30일 마침내 통수식(通水式)이 수도국산 배수지 내에서 성대히 거행됐다. 상수도 시대는 열렸지만 모두가 수돗물을 먹은 게 아니었다. 배수지보다 높은 고지대는 수돗물 도달이 어렵다고 판단해 급수에서 아예 배제됐다. 주로 아랫동네에 사는 일본인들이 수돗물을 먹었다.

1960, 1970년대 들어서도 이런 사정은 계속돼 단수(斷水)는 일상이었다. 집집마다 물지게, 초롱, 호스 등은 필수 세간살이였다. 어렸을 적 우리집에서는 이러한 물건을 본 적이 없다.

우리집 수도는 '특선'이라 단수 걱정 없다고 부모님은 늘 자랑삼아 말씀하셨다. 동네 파출소 순경들조차 가끔 우리집으로 물을 얻으러 오곤 했다. 모레(10월30일)는 인천지역에 한강 수돗물이 공급된 지 110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이다. 선친께서 그때 무슨 '백'을 쓰셨길래 파출소보다 우선이었는지 문득 당시 우리집 특선 수도 '역사'의 비밀을 더듬어 보고 싶다.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