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생 인천학도의용대 6_25참전회장

1950년 가을은 유난히 추웠다. 우리 후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건 애국지사들을 생각하고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특히 6•25전쟁을 기억해야 참상을 알 수 있다. 6•25전쟁 때 지도를 보면 남침이 증명된다. 대한민국은 자유롭게 농업과 산업에 종사하고 학생은 평화롭게 공부에 열중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군인이 없었고 경비대가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무기라고는 일본군이 버리고 간 구식 소총뿐이고 야포와 탱크는 생각도 못했다.

그해 6월25일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은 서울 한강을 넘어 인천과 수원을 점령하고 남녀 불문 꽁꽁 묶어 이북으로 끌고 갔다. 끌려간 국민들의 소식은 지금도 알 수 없다. 어렴풋이 기억하건대 충남 어느 산골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라 무덥고 먹을 게 없어 나무 뿌리를 캐 굶주린 배를 채우며 구걸하다시피 생활해야 했다. 그 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필자는 인천으로 돌아와 다니던 학교에 가보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생사는 알 수 없었고 텅빈 학교 건물만 남아 있었다.

학교 선배가 후배들을 모아 놓고 “나라가 있어야 배움도 있고 학교가 있다는 신념을 갖고 학도병을 조직하자”고 외쳤다. 이윽고 인천시내 남녀 학생 3000여명이 모여 인천을 지키자고 결의했다. 지금의 중구와 동구는 서구지대, 부평구 서구 계양구는 북구지대. 미추홀구 남동구 연수구는 남구지대로 각각 편성해 순찰과 봉사활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함경도까지 점령했으나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며 군인과 민간인을 무참히 살상하기 시작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자 인천의 학도의용대는 그해 12월18일 인천축현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여 조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겠노라 다짐하며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인천을 출발했다. 오후 3시쯤이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아! 사랑하는 부모 곁을 떠나는 마지막 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걸어 도착한 곳은 지금의 안양이었다. 피난 가 인적이 없는 빈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 걸어 수원에 도착하니 아침이었다. 인천을 떠날 때 어머님이 싸준 주먹밥을 펴니 눈물이 쏟아졌다. 여태 그런 따뜻한 주먹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우리는 수원에서 대구로 가는 화물열차를 타려 수원역에 도착했으나 열차는 피난민으로 가득차 화물열차의 화통 지붕에 올라탄 채 겨우 대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구 육군본부에서는 “학도병은 아직 어려 위험하니 마산에서 대기하라”고 만류했다. 결국 우리는 도보로 김천역까지 이동했다. 피난열차 편으로 삼량진까지 간 뒤 걸어서 마산에 도착하니 두 발은 부르트고 발바닥엔 피가 흥건했다.

1950년 12월29일 마산역에 집결한 학도병은 대략 2000명. 출발할 땐 3000명이었는데 11일 만에 1000명의 학우를 잃었다. 마산에 도착한 2000명 중 600명은 해병대로, 나머지 1400명은 육군으로 각각 배치됐다. 필자는 해병대에 차출돼 고된 훈련을 받았다.

이후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에 투입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강원도 인제 도솔산 전투에 이어 대우산 전투에서도 승리한 우리는 험악한 산악지대인 924 고지(일명 김일성 고지) 점령에 나섰다. 고지를 불과 30m 앞두고 필자는 북한군의 총탄 2발을 맞고 탄띠에 불이 붙어 화상을 입고 진해 해군병원으로 후송됐다. 억울하고 비참한 심정이었다. 3개월 후 다시 전선에 투입된 필자는 신병들을 가르치는 교관이 되었다.

세월은 무심하다. 이제 어느덧 나이 아흔 살. 돌이켜보면 전역을 미루고 6년을 복무한 뒤 사랑하는 가족과 그리운 이웃, 친구들이 있는 인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생의 과제는 봉사였다. 사랑하는 고향 인천과 부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됐다.

자랑스런 대한민국, 존경받는 국민이 되려면 단합하고 부강해져야 한다. 우리 국민 모두는 역사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미래에 남겨 줄 가장 큰 유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