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곳도, 거병 전 하던 일도 '오리무중'

을사의병 이후 군대해산 계기로 항쟁 확산

강원도서 기세 등등…부일군수 도망가기도

이천·양평서 활약하다 의정부·파주 이동

권준·왕회종·김진묵 의진과 1000명 규모

대규모 병력 운용…통감부도 긴장할 정도

<독립유공자공훈록>엔 출신지 경기 양평

일본군 '폭도수괴 조사표'엔 여주 포동리

경기도 경찰부장은 양평 양근읍으로 기록
▲ 1908년 10월 말 경기도에서 활약하던 의병장에 대한 조사인데, <br>​​​​​​​조인환 의병장은 양반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며, <br>현재 400여명의 의진을 구성함. <폭도에 관한 편책> 1908. 11. 24.)
▲ 1908년 10월 말 경기도에서 활약하던 의병장에 대한 조사인데,
조인환 의병장은 양반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며,현재 400여명의 의진을 구성함. <폭도에 관한 편책> 1908. 11. 24.)
▲ 조인환 의병장은 유생 신분이고, 출생지를 '여주군 대송면 포동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폭도수괴 조사표'·<폭도에 관한 편책>. 일자 미상)
▲ 조인환 의병장이 양평군양근읍 출신이었다는 <폭도에 관한 편책>(1910.03.07.)

 

◆ 군대해산 직후 의병의 모습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 8월에는 해산군인이 의병대열에 합류하게 되자 의병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전국으로 번졌다.

그에 앞서 을사년(1905) 7월, 강원도 영월 주천(酒泉)에서 원용팔(元容八)이 강원·경기·충북 등지의 의병을 모아 거의 했다. 그는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으나 을미왜란(을미사변·1895)이 발생하자 인근의 동료 전 사과 심상희(沈相禧)의 여주의진 후군장으로 참여하여 김하락(金河洛) 이천의진과 힘을 합쳐 남한산성을 점령했고, 뒤에는 유인석(柳麟錫) 호좌의진 중군장으로 맹활약을 벌였던 전기의병장 출신이었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뒤 일제의 군율통치와 고문정치에 반기를 들고 의병을 일으켰으니 후기의병의 물꼬를 튼 쾌거였다. 원용팔의 통문을 받은 정운경(鄭雲慶)이 충북 단양에서 거의하다 피체되어 황주 철도로 15년 유배를 갔고, 이어 민종식(閔宗植)의 홍주의병, 신돌석(申乭石)의 영해의병, 전덕원(全德元)의 용천의병 등이 있다.

이처럼 후기의병은 을사늑약 전후 시작되어 2년여 동안 의병투쟁을 전개되었는데, 해산군인의 참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평·원주·제천 여러 곳의 의병봉기는 모두가 해산 병정들인데, 양총을 소지하고, 또 일찍이 조련을 거친 바 있으므로 규율이 있어 일병(日兵)과 싸우면 살상이 심히 많으므로 세력이 크게 장대하여 병수(兵數)가 거의 4, 5천 명이나 된다고 한다.” (필자 역·김윤식, <속음청사(續陰晴史)> 하. 1907. 8. 19.)

해산군인들은 군대해산 이전 의병활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강원도·경기도·충청북도 일대의 의병들과 합류하게 되니, 그 기세는 대단했던 것이다.

“일병 100여 명이 군기(軍器) 28태(馱:바리-필자 주)를 싣고 강원도를 침입하였다. 그 때 동협(東峽:강원도-필자 주) 의병이 날로 치성하여 하여 수재(守宰)가 다 달아나니 관청을 비운 곳이 19군(郡)이라.” (황현 저·김준 역, <매천야록>. 761쪽)

의병들의 위세가 크게 떨치자 부왜내각에서 임명된 군수들은 대부분 달아나고 강원도 일대는 의병들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해 가고 있었지만, <매천야록>에는 “관동지방 민중은 의병들의 음식 제공으로 인하여 감자의 종자를 구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기록하였다. 한국주차 일본군사령관은 군대해산 이후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8월 1일 경성에 있어서의 소전(小戰:시위대 봉기-필자 주) 이래 비염(匪焰:의병세력-필자 주)이 특히 증가하고, 이후 각지에 만연하여 8월 6일에는 강원도 진위대의 폭동이 되고, 동월 10일에는 경기도 강화분견대의 폭동이 되어 기타 경기·강원·충청·황해·경상·전라의 제도가 상종하여 폭도(暴徒:의병-필자 주)를 보게 되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1권. 499쪽)

▲ 조인환 의병장이 양평군양근읍 출신이었다는 <폭도에 관한 편책>(1910. 3. 7.).
▲ 조인환 의병장은 유생 신분이고, 출생지를 '여주군 대송면 포동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폭도수괴 조사표'·<폭도에 관한 편책>. 일자 미상)

 

◆ 양주_·파주·_적성에서 1000여 의병 이끌다

주차일본군사령관이 일본군 참모총장에게 보고한 문서인 이른바 <조선폭도토벌지>에는 1907년 8월부터 9월 동안 주요 의병장 활약 개황을 정리하였다.

<표1 참조>

이 표에서 강화분견대 봉기에 일본군 1개 소대가 배치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실제는 달랐다. 8월3일 수원진위대 해산을 완료한 고쿠라(小倉) 대위는 일본군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강화분견대 해산을 위해 기관총 2정으로 무장한 오사키(大崎) 소위 이하 보병 1개 소대를 대동하고 갑곶에 상륙하려고 할 때가 8월10일 오후 4시, 갑곶 동측 성벽에 잠복하고 있던 강화분견대 군인들이 갑자기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일본군 6명을 사살하고, 5명의 부상자를 내게 한 후 강화 동문쪽으로 향하자, 일본군은 갑곶 북측 고지로 후퇴하여 야영하는 상황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사령관은 보병 제14연대 1대대장 이카시(赤司) 소좌에게 기관총 2정으로 무장한 보병 2개 중대, 공병 1소대를 이끌고 가서 진압하도록 하였다.

이강년·신돌석 의진이 경북 문경 부근에서 의병투쟁을 벌였다고 했으나 이강년 의병장은 충북 제천을 중심으로 강원·경북·충북 3도 48진의 도체찰사(광무황제가 심상훈에게 비밀칙령 전달)로 활약했고, 신돌석 의병장은 일월산을 중심으로 영덕·영양·평해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양주·파주·적성 등지에는 “조인환·권준·왕회종·김진묵 이하 약 1000명”이 활약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이천·양평 등지에서 활약하던 조인환 의진이 의정부·파주로 이동해서 의병투쟁을 벌였고, 권준 의진이 적성에서, 왕회종·김진묵 의진이 마전·삭령·양주에서 약 1000명의 의병으로 의병투쟁을 벌였던 것인데, 서울 인근에서 대규모 의진이 활동하고 있다는 데 일제통감부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특히 충북지역과 함께 공병부대가 동원된 것이다. 남한강, 한강, 임진강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진압을 위한 것이었다.

 

 

<조선폭도토벌지>에는 1907년 8월부터 12월까지 의병과 일본 군경과의 격전 회수와 의병수를 정리하였다.

<표2 참조>

 

1907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25일까지는 13도 창의진이 서울진공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지역으로 진격할 때였다. 그 시기 '양주·파주·적성에서 조인환·권준·왕회종·김진묵 이하 약 1000명의 의병'이 활약하고 있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5개월 동안 연인원 4만4000여명의 의병이 기관총과 연발총을 소지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 조인환 의병장의 출생지와 주요 의병장에 대한 일제 기록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권에는 조인환 의병장의 출생지를 경기도 양평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기밀문서에는 두 곳으로 나타나 있다.

<폭도에 관한 편책>의 '폭도수괴 조사표'에는 '여주군 대송면(大松面) 포동리(浦東里)'라 하였고, 경기도 경찰부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문서 '수괴 조인환에 관한 건'에는 '양평군 양근읍' 출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주차 일본군사령관이 일본군 참모총장에게 보고한 문서 '군 참1발 제304호'(1908. 7. 15.)에는 '저명한 한국폭도의 수령(首領) 조서'라고 하여 전국 주요 의병장 65명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 이 문서에서 조인환 의진과 연관이 있거나 활약지가 겹치는 10명의 의병장을 정리해 보았다.

<표3 참조>

이 기록은 의병장의 출신이나 출생지 등에 관한 것을 대부분 '불명'이라 했고, 그 활동상에 관한 것도 매우 부실하다. 특히 이인영 의병장은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는데, 지평이라 하였고, 권득규 의병장도 1907년 9월2일 전사 순국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귀순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조인환 의병장이 “토벌대에게 양근에서 체포”라고 했는데, 실제와는 매우 다르다. 조인환 의병장의 활동상이 1907년 8월부터 1909년 12월까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에 이어 내부 경무국에서 엮은 <폭도에 관한 편책>에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