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27. 경기도 북부지방 의병장 김연성(상)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27. 경기도 북부지방 의병장 김연성(상)
  • 인천일보
  • 승인 2020.07.19 20:13
  • 수정 2020.07.19 20:13
  • 2020.07.2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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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성균관 졸업 후 박사로 임용
1년 후배 신채호는 논설로 항일운동

1907년 양주·적성 일대서 활약하다
권중설 의진 참모로 허위 의진과 연합

서울진공 통문에 호응…직할대 편재
작전 중지로 본거지 철군 통보하면서
이강년 휘하 호서창의진에 도움 요청

김박사, 일제 국권침탈 맞서 책을 놓고 총을 들다

▲ 김연성 의진 활약지 왕방산 일대. 당시 주소는 경기도 포천군 서면 선단리이고 현재는 포천시 자작동이다.
▲ 김연성 의진 활약지 왕방산 일대. 당시 주소는 경기도 포천군 서면 선단리이고 현재는 포천시 자작동이다.

◆ 성균관 박사로 벼슬길에 나아가다

1901년 2월, 태학(太學) 유생 30여명이 중추원의장에게 '헌의서(獻議書)'를 올렸다.

성균관(成均館, 일명 태학太學)에서 수학하던 진사 이제홍(李濟弘)·송태회(宋泰會), 생원 성낙현(成樂賢) 유학 김연성(金演性)·신채호(申寀浩) 등 30명이 중추원 의장에게 최근의 법규가 예에 어긋나고, 풍속을 해치는 것이 많으니 재고하기를 건의한 '헌의서'를 제출한 것이었다. 당시 성균관은 2개 반이 운영되었는데, 김연성 등 12명은 이제홍 진사 반에, 신채호 등 16명은 송태회 진사 반에 속했다.

성균관은 과거제도가 폐지된 후 1895년부터 전·후 2학기 3년제였는데, 20세 이상 40세까지의 연령제한을 두었고, 시험에 합격해야 입학과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김연성(金演性), 정좌섭(丁佐燮), 송병익(宋炳益)을 성균관 박사에 임용하였다.” (<승정원일기>. 1904. 5. 24.)

“성균관 박사 김연성ㆍ정좌섭ㆍ송병익을 의원면직하였다.” (<승정원일기>. 1904. 6. 23.)

“신채호(申寀浩), 유희익(柳熙益), 권봉집(權鳳集)을 성균관 박사에 임용하였다.” (<승정원일기>. 1905. 4. 4.)

“성균관 박사 신채호ㆍ유희익ㆍ권봉집을 의원면직하였다.” (<승정원일기>. 1905. 4. 5.)

 

김연성은 신채호보다 1년 먼저인 1904년 성균관을 졸업하고, 성균관 박사(정7품)에 나아갔다. 신채호는 붓을 들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나아가 논설로써 반일활동을 한 데 비해, 그는 총을 잡고 의병에 참여하여 반일투쟁을 벌였던 것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관리하고 있는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의 '디지털양주문화대전'에는 김연성에 대하여 “호는 박사. 호가 박사이므로 사람들로부터 김박사라고 불렸다.”라고 기술해 놓았으니 이는 일제의 <폭도에 관한 편책>의 내용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축산리헌병보조원 5명(그중 2명은 경성에서 체포되었다 한다)이 도주한 것은 인민으로부터 금전을 강청한 비행의 폭로를 두려워함에서 나온 것이 한 원인이나 김범일(金範一)의 협박이 있었음은 그것이 대원인이다. 김범일(인성演性이라고도 한다)은 축산리의 출신으로서 왕년 경성 성균관에서 수학, 박사 호를 가져 사람이 호칭 김박사라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31쪽)

 

김연성의 호는 송천(松川)으로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축산리 출신이다. 일제의 기밀문서에 “김범일(金範一, 演性이라고도 한다)”라는 것으로 보아 '범일'이 그의 자(字)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김연성 의병장이 양주군 이담면 축산리 출신으로 경기도 연천·포천, 황해도 연안·평산에서 활약한 것을 정리한 기밀문서(<폭도에 관한 편책>.1909. 3. 12.).
▲ 김연성 의병장이 양주군 이담면 축산리 출신으로 경기도 연천·포천, 황해도 연안·평산에서 활약한 것을 정리한 기밀문서(<폭도에 관한 편책>.1909. 3. 12.).
▲ 권중설·고재식 의병장 피체 기사(대한매일신보. 1910. 3. 17.).
▲ 권중설·고재식 의병장 피체 기사(대한매일신보. 1910. 3. 17.).
▲ 김연성 의병전투지(경기도 동두천시 평화로 일대).
▲ 김연성 의병전투지(경기도 동두천시 평화로 일대).

 

◆ 권중설 의진에 참여하다

김연성은 1907년 9월 창의하여 경기도 양주·적성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권중설(權重卨, 일명 重熙) 의진에 참모로서 활약하게 되었다.

그 무렵 참봉 출신 왕회종(王會鍾) 의병장과 의사 출신 김진묵(金溱默) 의병장은 많은 의병을 모집한 후 의진을 이끌 명망가를 찾던 중, 때마침 전 의정부 참찬 허위(許蔿)가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의진을 찾아나섰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맞이했던 터였다.

허위가 의병장에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 권중설은 김연성과 함께 의진을 이끌고 가서 허위 의진과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관동의병대장 이인영(李麟榮)으로부터 전국 의진이 일시에 서울로 가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일제와 담판을 벌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통문이 날아들자 김연성은 허위, 권중설, 왕회종, 김진묵 등의 의병장과 함께 서울진공에 참여하였다. 권중설 의병장은 13도창의진 진동(경기·황해도) 의병대장이 되었다가 이인영 직할대장으로서 서울진공에 앞장서게 되었는데, 김연성 의병장도 그의 참모로 활동하였다.

13도창의진의 13차례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한 이후 1908년 1월28일 서울진공이 중지되자 권중설 의병장은 허위 의병장과 함께 임진강 유역으로 돌아와서 서울진공을 다시 시도하고자 통문을 내었으나 호응이 적어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얼마 후 허위 의병장이 피체되자 의진을 수습하여 창의군수부(倡義軍帥府) 대장으로서 이은찬 중심의 창의원수부(倡義元帥府) 의진과 함께 경기도 양주·포천·영평·연천·장단·마전, 강원도 춘천·철원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벌였고, 1909년 3월 경성 각국 영사에게 통고문을 발송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10년 3월13일 적성헌병분견소 헌병들에 의해 포천군 청송면 백호리(白湖里)에서 고재식(高在植)과 함께 피체되었다.

권중설·고재식 의병장 피체에 대한 기밀문서는 1910년 3월16일 경성헌병분대장 야쿠시가와(藥師川) 소좌는 한국주차헌병대장 사카키바라( 原昇造) 소장에게 보고하고, 사카키바라는 그날 내부경무국장 마쓰이(松井茂)에게 통보할 만큼 비중이 컸던 의병장이었다.

 

“경상북도 안동군 내성면(乃城面) 유곡리(酉谷里)

권중설(權重卨) 47세

충청남도 홍주군 서면(西面) 백석동(白石洞)

고재식(高在植) 36세

지난 40년(메이지 40년. 1907년-필자 주) 10월경부터 고 폭도수령(의병장-필자 주) 허위(許蔿)의 취포(就捕)에 이르기까지 우 양명은 그 배하(配下)에 속하여 각 일방의 수괴(의병장-필자 주)가 되어 각 50명 내외의 부하를 인솔하고 경기도 양주·포천·영평·연천·장단·마전, 강원도 춘천·철원의 제군(諸郡) 지방을 횡행, 특히 권(權)은 창의원수부(倡義元帥府:창의군수부倡義軍帥府 오기-필자 주) 대장(大將)이라고 자칭하고 때로는 앉아서 제종(諸種) 계책을 부하에게 지시하고 지난 봄 경성 각국 영사에게 서(書)를 보내고자 하여 혹은 징발적 격문을 산포하여 소재 인민의 금품을 강청, 혹은 약탈한 자로서 허위 취포 후는 고(高)와 함께 전기(前記) 지방에서 행동하였는데, 3월13일 적성헌병분견소 상등병 1명, 보조원 2명은 적도(賊徒:의병-필자 주) 수색 중 적성의 동남 약 5리 포천군 청송면 백호리 능내(陵內) 주민 김백령(金白靈)의 가댁에 잠복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양명을 체포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7권. 597~598쪽)

 

권중설 의병장은 1910년 3월13일 피체될 때까지 창의군수부를 지휘하다가 피체되었는데, 일제의 헌병대에서 심문을 받을 때 당당했다는 내용이 황성신문에 실려 있다.

 

“권중설의 심문

거(去) 13일에 포천 등지에서 체포된 전 허위의 부하 용장(勇將) 권중설(權重卨)·고재식(高在植) 양명은 21일에 경성에 지(至)하여 목하 헌병대에서 심문을 당하는 중인데, 권(權)은 식견과 학문이 풍부하고, 풍채와 기모가 당당한 학자라 헌병의 심문에 대하여 일불토진(一不吐眞:조금도 진실을 말하지 않음-필자 주) 한다더라.” (황성신문. 1910. 3. 24.)

 

◆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다

13도창의진은 1907년 10월경부터 경기도 양주를 중심으로 서울 인근으로 모여들어 11월부터 이듬해 1월25일까지 무려 13차례나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했지만, 기관총과 6연발 소총 등으로 무장한 주차한국일본군 북부수비관구 사령관 오카자키(岡崎) 중장이 이끄는 일본군이 서울 인근을 철통같이 방어하는 바람에 13도창의진 1만여 명 중에 전직 군인 출신이 3000명을 헤아렸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1월28일 13도창의진 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부음을 전해 듣고는 군사장 허위에게 13도창의진에 참여한 48개 의진에 서울진공을 중지할 것을 명한 후 귀향하자, 허위는 이를 각 의진에 통보하게 되었는데, 이때 김연성 의진은 호서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의진을 찾아갔던 내용이 <운강선생창의일록>에 수록돼 있다.

 

“융희 2년 무신 정월 초하루(양력 2월2일-필자 주) 정해일. 각 부대 장병들의 신년 하례를 받고 이어 적의 정세를 탐지하였다.

논남기(論男基)에서 보고하기를, “20여명의 적이 와서 본동을 침범한다.” 하였고, 용소동(龍沼洞) 방수장(防守將) 박경팔(朴敬八)의 보고에, “어제 논남기에 왔던 적이 귀본령(貴本嶺)을 넘어 영평(永平)의 적과 합류하여, 약 80여명이 행낭리(行廊里)에서 수일을 머물다가 물러갔는데, 진동(鎭東:진동창의진-필자 주) 참모(參謀) 김연성(金演性)과 안동장(安東將) 김용익(金龍翊)이 군사 30여명을 거느리고 적에게 쫓겨 용소동에 와 머무르며 구원을 청하는 의사를 보인다.” 하므로, 공은 서로 연락될 수 있는 곳에 머물게 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권. 265쪽)

 

서울에서 각지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하고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위세에 13도창의진 48개 의진 중, 상당수는 본거지로 회군하지 못한 채 일본군에 쫓겨야 했다. 김연성 의병장은 진동창의진 참모였는데, 본거지였던 양주 방면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일시 이강년이 이끈 호서창의진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 드러나고 있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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