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 우리가 아는 그 베토벤이다. 클래식에 문외한인 사람도 ‘딴따따 따~안~’은 들어본 적이 있을 거다. 이 선율은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의 첫 부분이다. 베토벤은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군포시장이 왜 난데없이 베토벤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해하는 분도 계실 거다. 베토벤의 인생 궤적이 지금 우리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에 교훈을 얻으려 한다.

교향곡 5번은 인간이 운명을 헤쳐나가 결국 이겨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베토벤은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었다. 청각 상실과 자신에 대한 사회 일각의 몰이해 등이 겹쳤다. 청각 상실은 음악하는 사람에게는 치명타이다. 오죽하면 베토벤이 자살까지 생각했을까. 베토벤이 1802년에 작성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죽음은 나를 끝없는 고뇌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죽음을 용감히 맞으리라.“ 다행히 베토벤 유서는 실행되지 않았다. 베토벤은 예술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운명에 맞서는 투쟁의 역사를 써나간다. 청각 상실이라는 위기는 그에게 기회로 바뀌었다. 베토벤은 외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됐다. 음악 규칙이나 관습에 얽매일 필요도 없게 됐다. 대신 그는 새로운 음악언어, 즉, 내면에서 나오는 영혼의 소리에 침잠(沈潛)했다.

베토벤의 다음 목적지는 자연이다. 6번 교향곡 ‘전원’은 베토벤의 자연예찬을 담고 있다. “숲 속을 거닐 때, 나무들을 지날 때, 풀과 돌멩이를 밟으며 걸어갈 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베토벤은 말한다. 운명을 이겨낸 이후 마음의 안정을 자연에서 찾은 듯하다.

이제 베토벤 교향곡은 정점으로 나아간다. 9번 ‘합창’이다. 운명을 이겨내고 자연에 흠뻑 빠져있던 베토벤의 최종 정차역은 인류다. 인류 공동체에 대한 사랑, 즉, 인류애(人類愛)와 평화를 제창한다. ‘합창’ 가사를 보자.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 운명이라는 위기가 기회와 변증법적으로 작용해 자연을 거쳐 인류애로 승화됐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합창’은 인류에 미친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코로나19 발생을 두고 인간이 자연을 함부로 대해서 자초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인이야 무엇이든 인간에게 닥친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오만함을 부리다가 위기에 처하면 서로 뭉쳐서 지혜로움을 발휘한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이런 반전을 수차례 경험한 학습효과도 있다. 그래서 코로나19라는 운명에 맞서 싸울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확신한다.

7월 1일로 시장 임기가 반환점을 돌았다. 지난 2년을 스스로 평가해보건대 잘한 점도 있고, 부족한 점도 있다. 나는 얼마나 진심으로 군포를, 시민들을 아끼고, 존경하고, 사랑했는가. 코로나19로 시민들이 힘들어할 때, 나는 시민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하고 되돌아본다. 신발 끈을 다시 단단히 조여 맨다.

다른 지역 주민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군포시민들도 여전히 고생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운명에 굴복하지 말고 이겨내야겠다. 시장이 코로나19를 퇴치할 수는 없지만, 시장의 권한과 시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라도 이겨내고 피해 극복 지원에 주력하겠다. 군포와 군포시민들을 더 많이 사랑하려 한다. 그래서 ‘시민 우선, 사람 중심’의 뜻을 더욱 깊이 되새겨본다. 시민들도 서로를 격려하고 보듬어 안아주고 배려하는 마음을 다졌으면 한다. 베토벤이 천형(天刑)에 버금가는 청각 상실을 이겨냈듯이, 우리도 코로나19를 이겨내야겠다. 베토벤이 인류애(人類愛)를 역설했다면, 시장인 나는 시민애(市民愛)를 외치겠다.

올해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지구촌 곳곳에서 베토벤의 주옥같은 곡들이 울리고 있다. 군포 프라임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베토벤 작품을 골라서 올해 연중 기획연주로 진행중이다. 기회가 되면 콘서트장으로 가서 베토벤을 만나 묻고 싶다. “당신이 추구했던 인류애와 평화의 참뜻은 무엇입니까?”

 

 

한대희 경기도 군포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