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밤낮 전투로 지켜낸 요충지
사상자만 930여명 치열함 방증
산 정상 경일암서 마지막 혈전
51사단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도
▲ 6·25 전쟁 당시 의왕 모락산에서 한국군과 유엔군 등이 치열하게 교전을 벌였던 '모락산 전투' 현장에서 작년 5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육군 51사단 장병들이 유해를 수습하고 있다(왼쪽).산 정상 부근에 설치된 전투요도. 중공군과 교전을 벌였던 옛 경일암 사찰터(오른쪽 위).박철하 의왕향토문화연구소장이 바위에 총탄자국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설명하고 있다(오른쪽).모락산 국기봉에서 바라본 의왕과 안양시. /김철빈 기자 narodo@incheonilbo.com

 

서울과 수원을 잇는 사통팔달의 교통요충지인 의왕시. 도심을 비켜선 야트막한 모락산. 해발 385m의 모락산 정상에 오르면 의왕 도심은 물론 안양, 군포, 과천, 멀리 시흥이 한눈에 들어 온다.

모락산은 험하지 않은 등산로와 정상에서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훌륭한 자연경관, 둘레길 등으로 수많은 시민이 찾는 도심 속 휴식처 역할을 한다. 시민들이 모락산에 오르지만, 70년 전 이곳은 '비극의 아픔' 오롯이 품고 있는 전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관련기사 3·19면

모락산은 6·25전쟁에서 손에 꼽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만큼 뺏고 뺏으려는 유혈 전투가 치열했다. 유엔군은 1951년 1월31일 터키여단을 좌측에, 미 25사단 35연대를 중앙에, 한국군 1사단 15연대를 배치해 앞서 모락산을 점령한 중공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다시 2월3일 유엔군은 중공군의 퇴로를 막으며, 모락산 정상 일대를 재차 공격해 탈환했다. '모락산 전투'는 그렇게 나흘 밤낮을 국군과 유엔군이 사투를 벌여 지켜낸 곳이었다. 그 성과는 전장의 열세를 우세로 바꾸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 군은 모락산 승리의 기세에 힘입어 지금의 1번 국도와 47번 국도를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안양을 지나 인천과 영등포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에 한강 이남 주 저항선으로 서울을 사수하려던 중공군의 계획은 무산됐고, 서울을 되찾았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상자를 보면 930여명으로 모락산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방증한다. 중공군 663명이 사살됐으며, 한국군 70명이 전사했고 200여명이 부상했다.

23일 오후 2시 의왕시 오전동 의왕시여성회관 뒤편. 시민에겐 뒷동산처럼 친숙한 모락산의 '숨겨진 전투 현장'을 찾기 위해 박철하 의왕향토문화연구소장과 정상까지 동행했다.

과거 모락산 일부였던 의왕시여성회관 인근은 현재 아스팔트가 깔리고 아파트로 가득 차 있다. 여성회관 뒤편엔 산 정상까지 빠르게 오를 수 있는 길이 있어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모락산에 들어서자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들어선 햇빛 때문인지 평화로운 듯 고요했다. 하지만 길이 좁은 데다가 꽤 가팔랐다. 얼마 가지 않아 숨이 턱에 차기 시작했다. 이곳부터 오른편의 오매기 마을까지는 국군이 모락산 정상을 점령하기 위해 중공군과 1차 전투를 벌인 곳이다. 이 가파른 고지를 최병순 중령이 2대대를 이끌고 점령했으며, 오매기 마을 쪽은 유재성 중령이 1대대를 이끌고 점령했다.

지금은 전쟁의 상흔을 쉽게 찾을 수 없다. 특히 오매기 마을은 당시 대부분 집이 전소하면서 3채만 남았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다시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을 갖춘 상태다.

평일인데도 등산객이 많았다. 20여분 동안 산 중턱까지 오르는 과정에 모락산 둘레길을 따라 힐링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20여분을 더 오르자 경일암이 있던 터에 도착했다. 정상을 뒤로 커다란 바위들이 병풍처럼 에워싸있어 안락함을 더했다. 이곳 역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바위들을 눈여겨 살펴보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커다란 바위 곳곳에 움푹 팬 것은 총탄의 흔적들이었다.

박 소장은 이 현장을 마지막 격전지로 판단했다. 당시 사찰이 있기에 중공군은 이곳을 최후의 보루로 삼고 있었고, 한국군은 정상의 고지에 올라 마지막 소탕을 위해 총격전을 벌였다.

총탄흔이 남겨진 바위 앞쪽엔 몸을 숨길 수 있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고, 맞은 편엔 언덕이 있었다. 이러한 지형들은 당시 전시상황을 생생히 떠오르게 해준다.

박 소장은 “정밀한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바위에 새겨진 총탄과 경일암 터의 지리적 환경들을 고려하면 이곳은 한국군이 마지막까지 혈전을 벌인 곳이다”라면서 “그때의 아픔이 여기 그대로 녹아 있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모락산에서 진행된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은 전쟁 70년을 앞둔 이달 19일 중단됐다.

육군 제51보병사단이 2009년 6월부터 2011년 5월까지 '6·25 전사자 유해발굴'에 나서 국군 전사자 유해 21구와 사진, 수첩 등 유품 1472점을 발굴했다.

/최인규 기자 choiinkou@incheonilbo.com



관련기사
[6 25 전쟁 70년] 갈가리 찢긴 삶의 터전 … 상흔 여전히 아물지 않아 6·25전쟁은 '톱질전쟁'이라 하듯이 전쟁 발발 후 1년 사이에 공산군과 유엔군은 네 차례나 38선을 넘나들며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다. 이 모든 전장의 중심은 경기도였다.3년 간 치러진 전쟁으로 도는 무려 12만8740명의 민간인이 죽거나 다치는 피해를 보았다. 파괴·훼손된 건물이 2071만1469채, 자산피해액은 4억여원에 달했다. 곳곳이 남침에 맞선 전투, 적의 총포탄이 쏟아진 곳, 끝까지 고지를 사수하려는 저항, 민간인 희생 등으로 가득했다. 70년이 흘렀지만, 이 수많은 현장은 우리 주변에 아직 '6·25전쟁 민간인 학살' 진실 재규명…10년 만에 한 푼다 '6.25전쟁' 당시 극심한 이념대립으로 희생당한 민간인들의 원통함이 풀어질까.올해 12월 꾸려지는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1기 위원회가 해체된 지 10년 만이다.학계에서는 도내 민간인 학살현장은 100곳 이상, 희생자 규모도 6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과거사법)이 지난달 19일 국회를 통과하면서 정부가 직접 진실 규명에 나설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이 개정안은 2010년 5년(20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