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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17. 강화도까지 진출한 평산·풍덕 의병장 심노술(하)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17. 강화도까지 진출한 평산·풍덕 의병장 심노술(하)
  • 인천일보
  • 승인 2020.05.03 19:58
  • 수정 2020.07.31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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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도 못 잡은 신출귀몰 명장
조국독립 한 품고 이역서 지다

 

 

▲ 심노술 의병장이 만주지방으로 갔다가 황해도 평산으로 돌아왔다는 일제의 기밀문서.(<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7권. 534쪽)

 

▲ 심노술 의병장이 박정빈 의병장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재거의 했다는 일본 헌병대의 보고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 240쪽)

 

▲ 심노술 의병장이 박정빈 의병장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재거의 했다는 일본 헌병대의 보고서.(<폭도에 관한 편책>. 헌기 제694호. 1908.10.11.)

 

 

13도창의대진 서울진공작전 이후 황해도 이동

박정빈 의병장과 연통…각각 400~500명 모집

안악·곡산군 지방 산중에 주둔…활동 재개 계획

 

박 의병장, 스승 유인석 의병장과 연해주행 이후

1909년 휘하 100여명 이끌고 경기도 교하군 입경

낙하진서 배로 황해도 배천군 방면 이동 기록 남아

일제 `주괴'라 부를 만큼 강화·황해도 일대 맹활약

 

1908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일제 공격에

활동 기반이었던 민중 피해 날로 커지자 만주로 이동

이후 황해도 평산에 잠입하는 등 국내진공 꿈꿨으나

뜻 이루지 못하고 타향서 분사한 것으로 전해져

 

 

 

◆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작전 전개 후 재거의

심노술 의병장은 박정빈 의진의 중대장으로 활약하였고, 박정빈 의병장이 1907년 겨울부터 이듬해 1월까지 13도창의대진에서 활동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진동(鎭東:경기·황해) 의진의 아장(亞將)으로 활동하다가 교남(嶠南:영남)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한 후 황해도 지역으로 돌아와서 다시 의병을 모집, 의병투쟁을 준비하던 것이 <폭도에 관한 편책>(1908.10.21.)을 번역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에 나타나 있다.

 

정보

“폭도수괴(暴徒首魁:의병장-필자 주) 박정빈(朴正斌)

동 심노술(沈魯術)

위 두 사람은 오랫동안 그 소식이 불명이었던 바, 지난 9일 황해도 배천군으로부터 상경한 한인 아무개의 말에 의하면, 지금 그들은 황해도 안악과 곡산군 지방 산중에 있으며, 서로 기맥을 통하고 각각 400~500명의 무리를 모집하여 각처에 산재시키고, 가까운 날에 다시 활동하고자 하는 계획인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무리의 대부분은 원래 평양·강화도의 해산병으로 총기와 탄약은 모두 다수를 휴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 240쪽)

 

심노술 의병장은 박정빈 의병장과 기맥을 통하고, 각각 400~500명의 의병을 모아 각처에 분산 배치한 후 다시 의병투쟁을 벌일 계획이라는 정보이다. 박정빈 의병장이 스승 유인석 의병장을 따라 연해주 방면으로 떠나기 전의 모습이었다.

이듬해 활동에 대한 기록은 <통감부문서> 제6권 `폭도수령 심노술 경기도 교하 지방 출몰 건'(헌기 제591호. 1909.03.18.)에 드러나고 있다.

 

정보

“경기도 교하군(交河郡:현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교하읍·탄현면 일대-필자 주)에서 입경한 한국인의 말에 의하면, 폭도수령(暴徒首領:의병장-필자 주) 심노술은 부하 100여명을 이끌고 이달 7일 한밤중에 교하군 북면 낙하진(落河津)을 도선(渡船)하여 배천군 방면으로 향했다고 한다. 또 이 일행 중에는 청국인 몇 명이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100여명의 의진을 형성하여 경기도 교하군에서 배를 이용하여 황해도 배천군으로 이동했는데, 일행 중에 청국인 몇 명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이채롭다. 당시 청국인을 용병으로 고용한 사례가 이인영(李麟榮) 의진에서도 있었다. 이인영 의병장은 농토를 매각하여 청국인 용병 300명을 의진에 투입해서 의병투쟁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청국인 용병들이 오는 도중에 일본군의 습격으로 일부가 사망하고 되돌아가는 바람에 가산만 탕진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청국 용병을 고용하기까지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임이 명약관화하다.

 

◆ 독자적인 의진 형성하여 명성 떨치다

심노술 의병장이 독자적인 의진을 형성하기 전에는 박정빈 의진의 중대장, 김용기 의진의 부장(副將)으로 강화도에서도 의병투쟁을 펼쳤는데, 그 후에는 강화도 출신 지홍윤 의진은 물론, 박정빈 의진의 대대장 이진룡 휘하의 여러 의진과 연계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한 것이 황해도 경찰부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폭도 정찰 상황의 건'(1909.01.18.)에 나타나 있다.

 

“해주 동부, 특히 연안·배천 방면에 있어서의 폭도 출몰 상황은 지난번 누차 보고한 바, 그 후 해주경찰서에서 그 방면에 있어서의 폭도 상황을 정찰한 결과, 최근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적도(賊徒:의병-필자 주)의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및 총인원 수

주괴(主魁:중심 의병장-필자 주) 심노술인 바, 그 부하의 “지중대(池中隊)”이라 칭하는 지홍일(池洪一)(강화도로부터 도피하여 온 자)이란 자가 150여명을 모아 그 지휘 아래에 삼삼오오 각 방면을 출몰하고 있었다. 기타 이근수(李根守)·지석남(池石南) 2명이 이끄는 각 수십명의 집단이 있다. (후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162쪽)

 

이 보고서에는 심노술 의병장을 `주괴(主魁)'로 칭할 만큼 그 영향력은 컸고, 지홍윤 의병장이 심노술 의진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어진 보고서에는 의병의 근거지로 경기도 강화도와 황해도 평산군 도평(桃坪)이라 했으며, 의병들은 이합집산이 비상하여 황해도 배천군 화산·상금산·하금산·운산 등지로부터 경기도 각지로 나아갔고, 황해도 연안군 탁영대 방면으로부터 해주군 동부에 이르는 지역에서 의병투쟁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에 1909년 1월16일 연안수비대가 해주군 청단 부근에서 약 100명의 의병과 전투를 벌였는데, 의병들은 해안 방면으로 후퇴하자 해주수비대는 기선으로 연안과 연평도 부근으로 향하고, 해주경찰서에도 일·한 순사 5명을 파견하고, 수비병 10명, 헌병 3명에 합하여 1월16일 오후 12시경, 용당포(龍塘浦)로부터 배를 타고 정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다

심노술 의병장은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에서 황해도 평산 출신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일제의 비밀기록인 <폭도에 관한 편책>에는 경기도 풍덕에 거주한다고 기록했고, <통감부문서> 제6권 `폭도 수령에 대한 조서 보고 건'(1909.03.12.)에는 황해도 연안군 방동면(方洞面)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보고서에 나온 경기도 강화와 황해도 연안·평산·해주 등지에서 활동한 주요 의병장에 대한 것을 정리해 보면, 표와 같다. <표 참조>

이 문건에서 심노술의 신분을 `엽부(獵夫·포수)'라고 하였으나 주요 의병장의 신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보고서라서 신뢰하기 어렵다. 1909년 3월에 200명으로 구성된 의진을 이끌었으니, 비교적 대규모 의진을 이끌었다고 볼 수 있으며, `지홍률(池弘律)'은 지홍윤(池弘允) 의병장의 이명으로 강화도 출신이었다.

1908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의병진압을 위한 일제의 총공격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2년여 동안 의병을 후원한 민중들도 힘겨운 나날이었다. 의병들에게 식사, 옷, 짚신 등을 제공한 마을의 주요 인물을 처단하고, 연대책임을 물어 마을 전체를 불태우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의병활동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융희 원년 폭도(暴徒:의병-필자 주) 봉기 이래 황해도 내 각지를 배회하며 다수의 부하를 거느리고 위대한 세력을 떨치며 횡포를 마음대로 부리던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심노술은 그 후 토벌대의 수색이 엄밀해짐에 이르자 마침내 도내에 잠복할 수 없게 되어 지난해 3월경, 만주 안동현을 거쳐 만주 지방으로 도주했다는 풍평(風評)이 있었는데, 이번에 재령경찰서에서 파견한 토벌대에 의해 해주군 대덕면내를 수색 중, 심노술은 1명의 동행자를 데리고 평산 지방으로 비밀리 온 것 같다. 그는 통상 한인이 입는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양반용의 갓(상품의 검은 갓)을 쓰고, 등에는 괴나리봇짐을 지고 지팡이를 짚고서 3월7일 오후 8시경, 대덕면 아현동 귀순자인 조대순(趙大順)의 집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조대순으로 하여금 국전동(菊田洞. 지관식池寬植이 살육당한 마을) 부근까지 길 안내를 하게 하더니, 서쪽을 향해 떠났다는 것을 탐지하고, 수색대는 즉시 그 귀순자에게 대해 힐문(詰問)하자, 사실이 틀림없다고 대답하므로 어떻게 하여 심노술임을 알 수 있었냐고 추궁하자, 길 안내 후 이별에 즈음하여 내가 심노술이라고 인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즉시 서방 고산면 지방에 대해 엄중한 정찰을 했지만 끝내는 행방불명이라고 하므로 즉시 관하 각 경찰서 및 헌병 분견소에도 통지하여 목하 엄중 수배 중에 있으므로 이에 보고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7권. 534쪽)

 

이 문서에는 심노술 의병장이 만주 방면으로 나갔다가 다시 황해도 평산으로 돌아온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이후 그의 행방에 관한 일제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유인석·박정빈 의병장이 연해주로 나아간 후 이진룡 일행이 무기구입을 위해 연해주로 향했던 것과 연관이 깊은 것으로 추정한다.

일제가 1908년부터 융희황제의 의병해산 조칙과 함께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이를 물리쳤던 심노술 의병장.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심노술 의병장에 대하여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공훈록에는 `그는 중국 요동으로 망명하여 의병부대를 재조직,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분사(憤死)하였다'고 기록하였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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