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서 고아함 키우기, 수만금 가진 부자되는 것보다 어렵다
▲ '이운지' 삽화: 투호격도(投壺格圖, 그림으로 보는 투호 규칙)

 

이운지 8권: 이운지(怡雲志)는 선비들의 취미생활에 관한 기술이다. 선생은 이운지 ‘인’에서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인용한다. 상제(上帝)도 쉽사리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은 경상(卿相)이나 부자(富)로 사는 것,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게 아니란다.

선생은 바로 산림에서 고아함을 키우는게 제일 어렵다는 세상 이야기를 적는다. 선생은 상제도 들어주지 못하는 이 소원을 청복(淸福,맑은 복)이라고 부른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청복이 있는 셈이니 경상이나 부자를 부러워 말아야겠지만 그것이 그리 여의치만은 않다. ‘이운(怡雲)’은 중국 양나라 도홍경(陶弘景)의 시구에서 따온 말로 ‘산중의 구름을 혼자 즐긴다’는 뜻이다. 내용을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에 덜 이치가 담겨 있다. 옛날 몇 사람이 상제에게 소원을 빌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저는 벼슬을 호사스럽게 하여 정승 판서의 귀한 자리를 얻고 싶습니다.”
상제가 “좋다. 그렇게 해주마”라며 허락하였다.
또 한 사람이 말했다.
“부자가 되어 수만금의 재산을 소유하고 싶습니다.”
상제가 “좋다. 네게도 그렇게 해주마”라 하였다.
또 한 사람이 말했다.
“문장과 아름다운 시로 한 세상에 빛나고 싶습니다.”
상제는 한참 있다가 “조금 어렵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주마”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말했다.
“글은 이름 석 자 쓸 줄 알고 재산은 의식을 갖추고 살 만합니다. 다른 것은 바라지도 않고 오로지 임원(林園)에서 교양 있게 살면서 세상에 구하는 것 없이 한평생을 마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자 상제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 맑은 복을 누리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너는 함부로 망령되이 그런 요구는 말고 다음 소원이나 말해보아라.”

선생은 이 이야기를 이렇게 맺는다. “이 이야기는 임원에서 교양 있게 사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일은 참으로 어렵다. 인류가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수천 년이 되도록 과연 이 일을 이룬 사람 이 몇 명이나 되는가?”하며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難矣哉)라 탄식한다.

예규지 5권: 생산 활동과 관련된 유통, 교역을 기술한 부분이다. 선생은 예규지 ‘인’에서 백규(白圭)의 치산 기법을 본받으려고 편명을 ‘예규’라 했다고 밝혔다. 백규는 중국 전국시대 사람으로 시장의 가격 동향을 잘 살펴 부를 축적했던 인물이다.

백규의 경제론은 ‘남이 내다 팔면 사들이고, 남이 사들이면 내다 판다’였다. 즉 풍년이 들면 곡식이 싸지니까 싼값에 사들이고 실과 옷은 비싸지니까 내다 팔았으며, (흉년이 들어) 누에고치가 나돌면 비단과 솜을 사들이고 곡식을 내다 팔았다. 이런 백규의 재산 불리는 수법을 배워보자는 취지로 쓴게 ‘예규지(倪圭志)’다. 당연히 예규지의 주된 내용은 ‘재산 증식’이다. 선생은
또 같은 글에서 “자공(子貢)이 사고 파는 일로 이익을 얻은 것이 그의 현철함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고, 조기(趙岐)가 떡을 팔아 생계를 꾸린 것이 그의 훌륭한 학식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데, 우리나라 사대부들은 스스로를 높이 드러내 으레 장사를 비천한 일로 여기니, 참 고루하다”고 하였다. 사대부들에 관한 적절한 비판이지만, 이 글을 쓰는 나로서는 꽤 뜨끔하다. 더하고 빼면 영 실속 없는 산숫셈이기에 그렇다.

이제 선생의 글을 마쳐야겠다. 선생의 농학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로 집대성되지만, 그 이전에도 기초적 연구로서 농업 기술과 농지 경영을 주로 다룬 글도 꽤 된다. 선생의 글은 실생활과 관계되어서인지 생동감이 있다. 젊은 시절 지은 <풍협고협집> ‘금릉시서’를 보면 이를 알만한 낱말을 만난다. ‘금릉시서’는 좌소산인(左蘇山人)으로 알려진 선생의 형 서유본의 <금릉시초>에 붙인 서문이다. 선생은 이 글에서 ‘아산’(啞山)과 ‘아시’(啞詩)라는 비평어를 만들었다. 아산은 활기 없는 벙어리산이다.

따라서 아시는 선인들의 시나 모방하고 수식하는 데만 치우친 활력 없는 죽은 시를 가리킨다. 이러한 시를 ‘흙 인형에 의관을 입히고 말하기를 구하는 격’이라 한다. 선생은 이 글에서 형님의 시는 아시가 아니라며 “도로릉도로릉 맑은 샘물이 바위틈에서 솟는 모양(??若淸泉 從石??射)”이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활기, 뇌성, 우레, 구슬, 종소리, 삼강의 거센 물결 따위 비평어를 끌어온다. 그만큼 선생이 생각하는 글은 활동력이 있는 살아 숨 쉬는 글이었다. 선생이 만년에 쓴 <금화경독기>의 한 구절로 5회 연재를 마친다.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에서 책 내고 글 쓰는 일은 좀 서글프다.

“수십 년 동안 쓰고 고치는 수고를 하여 책을 완성하였으나 이 책을 지키고 관리하는 것을 부탁할 사람이 없구나. 어쩌다 펼쳐보면 슬픔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다음 회부터는 문무자(文無子) 이옥(李鈺,1760-1815)을 연재한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