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정미소였던 신흥동 창고.


중학교 시절 버스 통학 구간 중 사동 삼거리에서 수인역을 지날 때가 가장 지루했다. 차장 밖 한편으로는 미군 부대가, 다른 한편으로는 빨간 벽돌 창고가 어깨를 겹치듯 줄지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가동되었던 가토(加藤)정미소, 리키다케(力武)정미소, 오쿠다(奧田)정미소 등의 흔적이었다. 1930년대 일제는 경기도 이천, 여주 등 곡창지대의 쌀을 신흥동 일대 정미소에서 정미한 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현재의 삼익아파트까지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는데 정미소에서 흘러나온 누런 왕겨가 영종도 앞바다까지 둥둥 떠다녔다고 한다. 당시 겨는 훌륭한 땔감으로 다른 지방에서 부러워할 만큼 많은 겨가 나왔다니 정미소들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해방 후 각종 보세창고와 군수물자 창고로 이용되었고 고려정미소, 선경창고로 불리다가 70년대 중반 이후 하나둘씩 고고장과 디스코텍 등으로 용도 변경되었다. 주위에 민가도 없었을 뿐 아니라 천장 높게 두꺼운 벽돌로 지어져 간단히 손 보면 훌륭한 '춤' 공간이 되었다. 지난 1985년 도심재개발지구로 지정되었지만 흐지부지되었고 일부는 대형마트, 가전양판점, 물류창고 등으로 사용되었다. 최근에 남은 창고를 허물고 고층 오피스텔을 건축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들 창고는 1·8부두 개방, 제2국제여객터미널 이전과 맞물려 문화 벨트로 이으면 인천아트플랫폼 못지않은 보물창고가 될 귀한 자원들이다.

대학 진학 후 이곳을 가끔 기웃거리기도 했다. 통금이 있던 시기라 밤 11시경 영업이 끝날 무렵 늘 같은 노래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우리는 딕 훼밀리의 노래를 들으며 서둘러 창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일본 제국주의의 탐욕과 수탈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건축물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한번 허물면 '다음'은 없다.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