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군대 해산…울분에 찬 군인들 총을 들다 

 

▲ 유명규 의병장이 강화분견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갑곶돈대. /사진제공=강화군

 

▲ 강화진위대 간부들 기념사진.

 

▲ <통감부문서> 4권에 실려 있는 유명규 의병장 피체 후 피살 문건. 유명계(柳明啓)라는 다른 이름으로 표기돼 있다.

 

▲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져 있는 유명규 의병장의 위패.

 

▲ 데라우치 총독이 강탈해 간 <강화부지> 등 책자(일본 야마구치현립대학 데라우치 문고 소장본 필자 촬영).

 

휘하 병졸 50명 이끌고 봉기 앞장서
갑곶 일대 상륙하던 일본군과 전투
김포 통진으로 퇴각했다 피체·순국
훈장 추서됐으나 후손 찾지도 못해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제는 대한의 재정을 핑계로 대한의 시위대·친위대 등의 축소와 함께 6개 연대 18개 대대로 구성된 지방군대인 진위대를 8개 대대로 축소한 것은 1905년 4월16일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그 해 9월5일 포츠머스조약의 체결로 대한을 더욱 거세게 압박, 11월17일, "대한의 황제 아래 일본인 통감을 둔다"는 을사늑약으로 1906년 2월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의 군대를 해산하기 위해 비밀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군대의 화포, 기관총 등 중화기를 보관하던 용산의 병기창을 점령하고, 무기와 탄약의 관리를 일본군이 담당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1907년 7월31일, 마침내 일제는 그들 앞잡이 내각으로 하여금 융희황제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국방 및 병무를 한국통감부와 일본군에게 인계할 것을 요청하니, 대한은 원수부·시종무관부·군악대 등만 남긴 채 실질적인 군대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

◆ 선망의 대상이었던 강화도 군인
"광무 때에는 800명 군인을 양성하여 매월 3차례씩 정기훈련을 하였다. 좌영·우영 두 영문에서 나오는 4열 횡대가 4척의 간격을 두고 기세당당하게 행진하여 나올 때의 나팔과 북소리는 아침밥을 끓이는 처녀들이 밥물이 넘는 줄도 모르고 사립문 틈으로 내다보게 하였던 것이다. 남자들이 처마 밑에 줄지어 늘어서서 그 행진하는 용감한 기상을 보고 싱글벙글할 때 군인들도 용기가 백배하고 흥이 절로 났다. 10리 밖에 있는 훈련장에서 고된 훈련을 마치고 해동갑하여 영내에 회진하는 군인들의 다리는 피곤하기는커녕 그 씩씩함이 젊은 남녀들의 부러움을 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기훈련 날에는 촌락 부녀자들이 그 모습을 구경하려고 하루 먼저 읍내로 몰려들어 강화읍내는 그야말로 군인도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딸 가진 사람들은 군인사위가 많게 마련이었다. 당시로 말하자면 강화 군인이 아니었던들 개성의 그 많은 점포들이 어찌 견딜 수 있었으며, 부호의 문갑머리에 십전대보탕 그릇이 어디 있었으며, 충청·전라의 치안유지가 온전하였을까?
이와 같이 범 같은 강화진위대를 별안간 해산시킨다니 그 원통함은 그 어디에도 비길 수 없는 것이었다." (강화문화원, <강화사> 266~267쪽)

◆ 강화분견대 봉기 과정과 결과
1907년 8월11일 강화분견대가 해산된다는 소식에 강화분견대 군인들은 물론, 2년여 전 강화진위대를 강화분견대로 축소할 때 옷을 벗은 수백 명의 전 진위대 병사들도 비분강개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인 8월9일, 참교(叅校) 유명규(劉明奎·일명 유명계柳明啓)가 분견대 병졸 50명을 이끌고 무기고·탄약고를 파괴한 후 총기·탄약을 가지고 봉기를 주도하자 수많은 강화군민이 동조하여 그 수가 500여명(일본군 보고서에는 600명 또는 800명으로 기록한 것도 있음)에 달하였다.

8월3일 수원진위대 해산을 완료한 고쿠라(小倉) 대위는 일본군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강화분견대 해산을 위해 기관총 2정으로 무장한 오사키(大崎) 소위 이하 보병 1개 소대를 대동하고 갑곶에 상륙하려고 할 때가 8월10일 오후 4시, 갑곶 동측 성벽에 잠복하고 있던 강화분견대 군인들이 갑자기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일본군 6명을 사살하고, 5명의 부상자를 내게 한 후 강화 동문쪽으로 향하자, 일본군은 갑곶 북측 고지로 후퇴하여 야영하는 상황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사령관은 보병 제14연대 1대대장 이카시(赤司) 소좌에게 기관총 2정으로 무장한 보병 2개 중대, 공병 1소대를 이끌고 가서 진압하도록 하였다. 11일, 의병들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무기와 탄환이 부족하자 다수의 의병장은 의병을 이끌고 육지로 탈출할 때 유명규 의병장은 통진(현 김포시 통진읍)으로 나아갔다.

◆ 강화분견대 의병투쟁 기록
1894년 7월23일 일제가 일본군 5000여명을 동원하여 성벽을 폭파하고 경복궁으로 쳐들어와서 국왕과 왕비를 생포하다시피 한 사건이 갑오왜란이다. 일제는 그들 앞잡이들로 내각을 조직하고, 이듬해에는 왕비를 참살하는 을미왜란을 일으키자 '국수보복(國讐報復·나라의 원수를 갚자)'을 위해 일어난 의병이 한말 전기의병이고,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國權恢復)' 기치를 들고 일어나서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일본군경과 전쟁을 치르듯이 반일투쟁을 벌인 것이 후기의병이었다.

한말의병에 대한 기록은 의병장이 남긴 기록 약 40종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 있고, 일제의 <주한일본공사관기록>, <통감부문서> 외에 일본군의 <진중일지>, <조선폭도토벌지>, <전남폭도사>, <한국폭도 봉기의 건> 등과 일본 경찰과 일제 앞잡이 관리·경찰들의 보고서를 정리한 <폭도에 관한 편책>, <폭도사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 등이 있다.

그 중에서 <폭도에 관한 편책>은 1907년 8월부터 1910년 8월까지 3년 동안 의병과 관련된 1만여 건의 문서를 122권의 책으로 엮은 것인데, 강화분견대 봉기에 관한 것은 한 건도 없다.

1907년 8월부터 일본군경이 대한의 경찰 업무를 시작했지만, 일본으로부터 헌병·순사의 파견이 대규모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10월까지는 의병 진압과 관련된 문서가 드물게 나타나고, 10월9일 일본군 제14헌병대를 한국주차헌병대로 개편하여 경성·영산포·천안·평양·함흥에 분대, 전국 460여 곳에 분견소를 설치한 후 의병 진압에 본격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강화분견대 봉기, 유명규 의병장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 참1발 제46호
명치 40년 8월11일 참모총장
한국주차군사령관 보고
8월11일 오전 7시57분발 전, 11시13분착
어제 10일 고쿠라(小倉) 대위와 함께 강화도에 파견된 1소대는 이날 오후 4시 이 섬에 상륙하려고 할 때, 한국병 약 50명의 사격을 받고서 상륙을 강행하여 한 지점을 점령함. 한국병은 강화부로 퇴각하여 그 수효가 약 300명으로 증가, (강화도진위대의 병력은 약 50명이나 소총이 약 1000정 있을 것이니, 아마 폭민도 가담하고 있을 것임) 성벽을 의지하고서 방어함. 그래서 오늘 11일 오전 6시50분 용산(龍山) 출발로 다시 대대장 이카시(赤司) 소좌가 인솔하는 보병 2중대(1소대 결), 기관총 2정(앞서 파견한 것과 합하여 4정) 및 공병 장교 이하 14명을 증파하여 폭도를 진압하려고 함. 어제 전투에서 우리 손해는 하사 이하 전사 6명, 부상 5명으로 부상자는 어제 인천에 수용함.

● 문서제목 : 강화도 폭도수괴 유명계(柳明啓) 포박·총살 및 홍천 포위 폭도 소탕전 보고
문서번호 : 왕전(往電) 제60호
발신일 : 명치 40년 9월12일 오후 3시07분 경성발
발신자 : 장곡천(長谷川) 통감대리
수신일 : 명치 40년 9월12일 오후 8시30분 동경착
수신자 : 이등(伊藤) 통감
강화도 폭동 때 무기를 시민에게 나눠주고, 군수 및 일진회원을 살해한 적의 수괴인 유명계(柳明啓)라는 자를 이달 6일 강화도의 대안(對岸) 통진(通津)에서 포박하여 위병소에 유치 중, 저항하여 이를 총살했다고 함.

위의 문건은 대한에 파견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일본군 참모총장에게 전보로 보고한 문서로 '한국폭도 봉기의 건'에 실려 있고, 아래 문건은 하세가와가 이토(伊藤博文)에게 보낸 전보로 <통감부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강화분견대가 비록 2개 소대 규모이고, 유명규의 계급이 참교였을지라도 강화분견대와 강화군민을 이끈 의병장이었으니, 그의 피체와 피살 소식은 잠시 본국으로 간 이토에게 일본군사령관이자 통감대리 하세가와는 전보를 쳤던 것이다.

"유명규, 유명계는 통진 출신으로 강화분견대 하사 출신이었다는 기록은 있는데, 국내외 자료를 다 뒤졌지만, 그 구체적인 행적은 알 길이 없어요. 순국한 것은 구전돼 오는데…."

1991년 필자가 강화문화원을 찾았을 때 강화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홍재현(洪在賢)님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나 후손을 찾지 못해 훈장조차 전수하지 못했고, 위패마저 서울현충원과 서대문 독립공원 현충사에 모셔져 있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