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활약 뒤엔 험한 길 함께한 지사가
▲ 1907년 6~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밀사로 파견한 이준(왼쪽부터), 이상설, 이위종. /연합뉴스
▲ 구한말 강도남문의 모습.
▲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1907년 4월20일자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밀사로 출발하는 이준에게 건네준 신임장. /연합뉴스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감시망 피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밀사 이준 호위
을사늑약 무효 알리는 활동에 일익
 



◆이준 특사 호위무관 이능권 귀가하다

1907년 7월 초 해거름 무렵, 괴나리봇짐 차림의 두 사람이 강도남문(江都南門)을 나와 걸음을 재촉하여 부내면 국정리로 들어선다. 대문이 굳게 닫힌 어느 집 앞에 이르러 마침내 키 큰 사내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이리 오너라."
"…."
잠시 뒤 문이 열리더니, 40대 부인이 급히 나와 문을 연다.
"그간 무고하셨소?"
"흐흑…헉!"

버선발로 달려나온 부인은 사내 품에 안긴다.

키 큰 사내는 부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진정시키더니, 다른 사내에게 말했다. "장도에 노고가 많았으니, 우선 며칠 쉬게나. 어제 약조한 대로 초하룻날 보세."

사내를 보낸 키 큰 이는 헤이그특사 이준(李儁) 일행을 호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오르게 한 후 귀국한 이능권(李能權)이었다.
 


◆이능권, 이준 특사 호위무관으로 선발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능권은 그해 3월 하순경 급히 한성으로 향했다. 수군과 시위대 무관 시절 한때 상관이었던 사람이 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한성으로 오라는 서신을 인편으로 보냈기에 이능권은 그 사람을 따라 나선 것이었다.
며칠 뒤에 집으로 돌아온 이능권은 어디론가 다니더니, 한 청년과 함께 한성으로 향한 것은 4월20일경이었다.

이능권 일행이 한성에 도착하여 숙소에 머물고 있으니, 그날 밤 이준 일행 두 사람이 찾아왔다. 한 사람은 나유석(羅裕錫)이었다. 이준은 두 손을 내밀면서 말한다.

"원로에 노고가 많았소. 부관은 어디 출신이오?"
"강도 사람입니다."
"막중국사이니, 매사 조심해야 하오. 내일 아침식사 후 남대문역에서 상봉하기로 하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일제는 군율통치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재정이 허약함을 들어 군대를 절반 수준으로 축소했다. 더욱이 일진회가 일본군 앞잡이 역할을 하자, 이에 반발한 이준, 나유석 등 우국지사들이 공진회(共進會)를 설립하게 되었지만 얼마 후 이준과 나유석 등은 황해도 황주군 철도(鐵島)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은밀히 우국지사를 모을 때 이능권을 훌륭한 인물로 점찍어 둔 상태였던 터라 '막중국사 호위무관'으로 선발한 것이었다.

1907년 4월22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단 부사(副使) 이준 일행 4명은 상인 차림으로 하여 남대문역(현 서울역)을 출발, 그날 저녁 부산 초량역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여객선에 올랐다.
 



◆ 헤이그특사 파견은 언제부터였나?

1904년 1월23일, 광무황제는 총신(寵臣) 이용익(李容翊)을 청국 지푸(芝)로 보내어 열강의 기자들 앞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겠다'는 중립선언을 한 바 있었다.

1904년 수차례 일제의 무력시위에 의해 대한의 외부대신과 주한 일본공사 간에 체결된 '한일의정서'(1904. 02. 23), '한일협약'(1904. 08. 22)은 무효임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고, 1905년 을사늑약 문서는 옥새가 찍히지 않은 것이기에 무효임을 알리기 위해 이용익으로 하여금 비밀리 중국을 거쳐 프랑스로 향하게 했는데, 그가 청국 산둥성 옌타이(煙臺)에 기항하였다가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강제 귀국당한 것이 1906년 9월이었다.

지푸(芝) 오바타(小幡) 영사로부터 4일발 다음과 같이 전보가 왔음.
위해위(威海威:현 威海-필자 주)로부터의 정탐 보고에 의하면, 오늘 아침 6시 조선배로 인천으로부터 이곳에 도착한 일행 8명의 조선인이 있음. 그 중에 이용익의 인상화(印象畵)와 유사한 자가 있었는데 동인(同人)은 선편이 되는 대로 상해로 간다고 말했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906년 9월6일조 참조

일제와 부왜인(附倭人) 눈을 피해 헤이그특사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하였는데, 궁중에도 부왜인들이 득실거리던 상황이라 그 비밀이 새 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용익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 지녔던 신임장을 찢어 입에 넣어 증거를 없앴으나 일제에 의해 공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원래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1906년 6월에 개최될 예정이었다. 광무황제는 1905년 9월 러시아 황제로부터 이 회의에 대표를 보내달라는 공식 초청장을 받았지만, 실제는 그보다 일찍 이범진(李範晋) 주 러시아공사로부터 비밀리 정보를 받았던 터였다. 러시아 니콜라이 황제는 1899년 제1차 만국평화회의를 제안하고 주관한 경력으로 제2차 회의의 초청권을 개최지인 네덜란드 국왕과 함께 가지고 있던 터였다.

일제는 이 같은 초청 사실을 뒤늦게 알고 두 초청권자에게 '한국은 이미 외교권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초청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면서 회의를 1년 뒤로 연기시켜 1907년 6월에야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광무황제는 일제와 그들 앞잡이들의 공격에 어쩔 수 없이 이용익을 공직에서 내쫓았다가 비밀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게 하였다. 그는 출발 예정일이던 1907년 2월24일 블라디보스토크 숙소에서 아침밥을 먹고 급사하고 말았다.

헤이그특사 급사 소식은 비밀리에 알려져 광무황제는 후임 특사를 급히 물색하면서 뒤늦게 이용익의 죽음에 대하여 극진한 애도를 표했다.

육군부장(陸軍副將) 이용익이 졸하였다. 이에 대해 조령을 내리기를,
"이 재신(宰臣)은 마음가짐이 우직하고 일에 임해서는 과단성 있게 처리하였다. 임오년 이래로 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하였는데, 그가 한 일을 더듬어보면 역시 충성으로 일관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그가 서거하였다는 부고를 듣고 보니 참으로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졸한 부장 이용익의 상사에 장례 물품을 궁내부로 하여금 넉넉히 실어 보내게 하고, 시호를 내리는 은전은 시좌(諡座)를 기다려 거행하며, 비서감 승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907년 4월24일조 참조

이용익 특사는 일제에 의해 일본으로 납치된 후 10개월 동안 온갖 향응과 감언이설로 회유당했지만, 이를 끝내 물리쳤던 지사이기도 했다. 조령에도 나타났듯이 광무황제는 몹시 슬퍼하였고, 그의 부음을 들은 지 나흘 만에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던 것이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최익현(崔益鉉)이 1906년 8월28일 대마도에 구금되어 '실내에서 갓을 벗으라'는 것에 반발, '굶어죽겠다'고 임병찬(林炳瓚)에게 유소(遺疏)를 쓰게 한 후 단식에 돌입했다. '식비가 대한의 재정에서 나온 것'이란 말에 이틀 후에 단식을 중단했으나 그해 11월 이후 발병하여 1907년 1월1일 병사했다. 단식을 시작할 때 '아사순국 하겠다'는 유소를 병사한 후 임병찬이 귀국하여 그대로 올리자, 광무황제는 이를 무시하고, 시호는커녕 벼슬도 추증하지 않고, 장례비조차 내리지 않은 것을 보면, 광무황제는 의병장이나 우국지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었던 것일까?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