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택 칼럼] 기미물절
[지용택 칼럼] 기미물절
  • 인천일보
  • 승인 2020.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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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이 쓴 사기열전(史記列傳) 사마상여(司馬相如, BC179~BC117)편에 '기미물절'이라는 말이 처음 보인다. 이것은 중국 황제가 중국 대륙을 둘러싸고 있는 동서남북의 소수민족, 이른바 오랑캐를 통치하는 방법의 근간이 되는 원칙을 논하면서 등장한다. 평상시에는 소수민족을 옥죄지 말고 줄을 길게 늘여두되 고삐만 단단히 매어두면 된다. 유사시에 고삐만 잡아채면 자연스럽게 끌려오게 된다는 논리다. 고삐에 달린 줄이 길기 때문에 평상시에 소는 여기저기 자유롭게 풀을 뜯고 그늘을 찾아 쉴 수 있다. 이런 생활에 젖어서 자신이 주인의 고삐에 묶여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매일매일 편하게 지낸다. 그러던 어느날 주인의 필요에 의해서 고삐를 잡아당기면 일방적으로 끌려 나가 힘든 일을 하고, 때로는 제사의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 다반사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국과 약소국 간 사대외교의 기본이다. 이외에도 큰 나라들이 요구하는 것이 많다.

첫째, 자신의 시간을 살지 못하고, 강대국의 시간을 살라는 요구는 권력을 넘어 절대적 명령이었다. 예를 들어 영조(英祖, 1694~1776)가 '갑'을 영의정으로 제수(除授)할 때 날짜 표기를 영조 O년 O월 며칠이 아니라 같은 시대 청나라 황제 건륭(乾隆, 1711~1799) O년 O월 며칠로 기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중국의 연호(年號)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약소국은 매순간 자신의 시간을 살 수 없고, 황제의 시간에 맞춰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둘째, 관료의 복식은 중국 것을 그대로 사용해야 하며, 셋째 군대를 크게 양성할 수 없고, 성곽도 높게 구축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와 중국의 관계는 기미굴절의 관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그때그때 표현만 다를 뿐 역사적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큰 나라와 작은 나라 사이에 있었던 외교·권력 관계라고 볼 수도 있다. 중국이 고도 성장을 하면서 한중관계는 서로 협력하여 상호이익을 도모하면서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이라는 꿈같은 말을 지도자들이 서슴없이 한 적도 있다. 그래서 시진핑 주석이 청와대로 박근혜 대통령을 방문하고 뒤이어 박 대통령이 시 주석과 나란히 천안문 광장 위에서 중국군의 퍼레이드를 내려다보는 흐뭇한 광경도 있었다.

그러나 사드 문제가 터지자 중국은 싸늘하게 그리고 경제적인 협력에서도 돌변했다. 사드를 설치한 성주 지역 주민들은 지금도 반대하고 있는 데도 말이다. 미국은 전쟁을 함께 치러낸 혈맹관계라고 말한다. 그래서 평택에 10조원 이상의 세금을 들여 군사시설을 만들었다. 이것은 북한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미국의 세계전략을 위해 중국의 동북삼성(東北三省)을 내다볼 수 있는 군사시설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1년에 1조원 정도를 부담해 왔는데 미국은 느닷없이 5조6000억원 이상의 군사비를 추가로 부담하라는 기가 막힌 요구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너희는 부자 나라이니 그만한 돈은 부담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미국의 고위관료들이 한국 정부에 노골적인 압력을 가했는데도, 오랫동안 한국의 정치인들은 물론 이 땅의 지성인들 중에 이에 대해 일언반구 항의는커녕 이의 제기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정치와 사상 모든 면에서 권력을 독점했던 유림(儒林)이 1919년 기미독립운동 33인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었던 역사적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 것처럼 말이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선생이 심우장 만필(尋牛莊 漫筆)에서 "불행한 경지를 만나면 흔히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한다. 강자를 원망하고 사회를 저주하고 천지를 원망한다. 얼핏 보면 영웅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기를 약하게 한 것은 다른 강자가 아니라 자기이며 자기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사회나 천지나 시대가 아니라 자기자신이다. 망국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 이상 제2, 제3의 정복국이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자기 불행도, 자기 행복도 타에 의하여 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련하기도 하지만 가증스럽기가 더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은 밉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일본에서 찾는다면 그리고 원인을 중국에서, 미국에서 찾는다면 영원히 자주독립할 수 없다고 설파한 것이다. 그 책임이 우리 스스로에게 있어야 우리가 깨닫고 우리 힘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피를 토하듯 글을 남긴 것이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국가의 흥망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나라든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에 나라가 나의 나라를 망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수백년 부패한 정치와 현대문명에 뒤떨어져 나라가 망한 것이다." 선생은 극명하게 자각해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에 나라가 많아도 우리를 도와줄 나라는 없다. 자기 나라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 남의 나라를 도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자국의 이익이 전제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도움이란 있을 수 없는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강대국 사이에 처해 있는 나라는 힘센 나라에 대해서는 사대(事大)로 대접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사대주의(事大主義)는 배격해야 한다. 힘에 눌려 역사와 긍지 그리고 영혼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크게 깨어나야 한다.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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