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들어주고 서로 나누고…열차엔 정이 있었다

송도 사람들을 포함해 인천~경기도 서민들의 발이 되어준 수인선.

수인선은 생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교통수단뿐 아니라 당시 수도권 지역 유일한 유원시설인 송도유원지로 놀러 오는 이들의 이동 수단이기도 했다.

또 종점인 송도역에서 형성된 송도시장은 50년이 넘는 세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인천 경제활동의 근간이 되었다.

인천도시역사관과 인천일보가 수인선과 관련된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나 생생한 증언을 들은 자료를 정리해 두 번째 편으로 싣는다. 이번 편에도 특별히 김희주 인천역사교육연구소 소장이 조사에 참여했다.

 

▲ 수인선을 이용해 시장에 가는 사람들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 수인선 기차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 수인선 기차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 송도역 계단과 화장실 /사진제공=역전상회
▲ 송도역 계단과 화장실 /사진제공=역전상회
▲ 수인선 차장과 승객들 /사진제공=역전쌀집
▲ 수인선 차장과 승객들 /사진제공=역전쌀집

 

휴일엔 '송도유원지' 여객 몰려
객차 1~2량 추가로 연결해 운행

차장 2명씩 종점 오가며 교대 근무
안내·하차 확인·검표에 발권도 담당
자녀 청첩장 받을 만큼 승객들과 막역

1973년 남인천·용현역 폐쇄로 종점돼
영세상인 유입으로 '반짝시장' 열려
현재 송도역전시장 모태로 성장

 

#생계수단에서 낭만 협궤열차로
주말이나 공휴일이 되면 승객들이 수인선을 타는 목적이 평일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서울과 인천, 수원 인근 인파들이 서해의 갯벌과 송도유원지에 관광을 하기 위해 몰려드는 것이다.

수인선 안은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쌀과 생선 대신 여행의 부푼 가슴이 실리는 낭만 협궤열차로 변신했다.
여행객들이 대거 탑승할 때면 객차를 한 대나 두 대를 더 연결해야 할 정도로 승객이 불어났다. 당시 수인선 객차는 길이가 14.7m, 폭이 2.15m로 열차 1량당 좌석수가 50석에 정원은 90명이었는데, 그마저도 금세 만원을 이루었다.

"열차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보면 줄이 길어서 끝이 보이지도 않았어요. 송도유원지도 유명했지만 청학풀장에 아이들과 놀려고 오는 사람들도 많았어요."(신영자·1937년생)

"송도역 근처에서 슈퍼를 운영했는데 평일엔 학생들이 많이 팔아줬고 주말엔 관광객들이 몰려들었지. 장사 잘 됐어요."(차송자·1954년생·슈퍼운영)

"토요일과 일요일만 되면 기타 하나 메고 수인선 타고 놀러 가는 거예요. 인천에서 갈만한 데로는 송도유원지가 최고였으니까요. 놀러왔다가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또 그냥 가진 않아요. 시장서 뭐라도 하나 사주죠."(임동환·1956년생·역전쌀집)
 



#중간에 태우고 짐 들어주고 … 정겨웠던 수인선 차장
수인선의 차장은 총 4명이 2인씩 교대로 근무했다. 한 사람은 수원에서 출발하고 다른 한 사람은 송도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탔다.

차장의 임무는 객실 내에서 여객을 안내하는 것이다. 내리는 역을 육성으로 알려주고, 특히 역무원이 없는 곳에서는 노인 승객들이 잘 내렸는지까지 확인했다. 승차권 검표도 차장 역할 가운데 하나였다. 역사가 없는 정거장에는 대매소가 있어 승차권을 발매했는데 수지타산이 맞지 않자 신청하려는 사람이 없었고 기차 안에서 차장이 승차권을 발매했다.

차내식 승차권은 수인선에서만 사용했다. 검표가위로 승차한 곳에 구멍을 뚫고 내릴 때 다시 내리는 역의 구멍을 뚫어 요금을 정했다.

2량밖에 되지 않는 꼬마열차를 매일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보니 수인선 차장과 승객의 관계는 무척 가까웠다.
"동네분들이 정식 승강장이 아닌데도 세워달라고 손을 흔들면 세워주기도 했어요. 이런 승객은 차장에게 승차권을 샀지요. 주민들과 참 정겨웠어요. 짐이 무거우니까 같이 들어주면 돌아가는 길에 생선 한 토막 집에 가서 지져 먹으라고 주고 쌀도 한 바가지 주고 그랬어요. 막차 타고 퇴근하는 상인들이 하루 종일 장사하느라 씻지도 못한 새카만 손으로 꽈배기를 찢어서 먹으라며 주곤 했어요. 자녀들 결혼시키면 청첩장도 줬고 요즘과 다르게 진상부리거나 생떼 쓰는 손님도 없었어요. 시골 분들은 태워주는 것만도 고맙다고 했어요. 큰 보따리 짐 등은 추가로 운임비를 더 받았는데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라 야박하게 끊기가 어려웠죠."(서수범·1955년생·수인선 차장)

수원에서 출발한 막차가 송도역에 도착하면 차장과 기관사는 송도역 숙소에서 자고 다음날 첫차를 운행해 수원으로 돌아갔다.
 



#수인선과 송도시장
1973년 남인천역과 용현역이 폐쇄됨에 따라 송도역은 수인선의 종점이 됐다.

농작물을 남인천역 시장에서 판매하던 영세상인들이 송도역 맞은편 빈터에 노점을 벌인 것이 송도역전시장의 모태였다. 낮 기차에 와서 막차를 타고 갈 때까지 잠깐 열리는 시장이라 하여 반짝시장 혹은 도깨비시장이라 불렸다.

"반짝시장은 초등학교 때는 없었고 중학교 2~3학년 무렵에 생긴 것으로 기억해요. 그전에는 송도역 주변에는 시장이 아예 없었어요. 예전에는 수인역에 시장이 있으니까 거기로 가서 장을 봤지요. 수인역이 송도로 이전하면서 이곳에 시장이 생긴 거에요."(이정호·1964년생·송도방앗간)

비록 빈터였지만 땅 임자는 있었다. 노점상들이 모여들자 땅 주인은 관리인을 두고 자릿세를 받았다. 자릿세는 100원 정도로 수인선 기차요금보다 쌌다.

"우리 집 땅이 공터니까 보따리를 들고 와서 하나둘 장사를 하더라고. 청소도 해야 하니까 관리인 하나 두어서 청소비를 걷고 관리인한테 주고 했어."(김정자·1940년생·역전시장 토지주)

"변씨라고 돈주머니 차고 다니며 노점하는 사람들한테서 돈을 걷어갔어요."(최광순·1935년생·역전쌀집)

송도역전시장은 1년 365일 쉬는 날이 없었다. 추운 겨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깡통에다 촛불 켜놓고 그 위에 앉으면 그나마 온기가 돌았어요. 비닐 장막도 없었고 한겨울은 추위가 무서웠어요."(최광순·1935년생·역전쌀집)

수인선이 폐선된 뒤 송도역전시장에는 새로운 고층 건물이 들어섰다. 새로운 건물에는 치과 등 전문 업종이나 규모가 큰 상점이 생겨났다. 임대료가 비싸서 이전 상인들은 건물 뒤편으로 밀려나 새로운 터전을 만들었다. 현재의 송도역전시장이다.

"수인역 있을 때가 좋은 시절이었죠. 물건도 싸고 사람도 좋고. 지금은 물가도 비싸잖아요? 돈 만원만 가지고 가면 사고 싶은 거 다 샀는데. 콩나물 100원어치만 사도 온 식구가 다 먹었지요." (송음전·1935년생)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