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부평서 대우차 생산
본사 이전 추진 등 각별 인연
외환위기 맞고 해체의 길로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생전 모습./사진제공=연합뉴스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향년 8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김 전 회장은 한국 경제 성장기를 이끈 주역으로 중공업과 전자, 전설, 통신, 정보시스템, 금융뿐 아니라 자동차 산업에서도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세계경영'의 토대를 만든 인천에 대우 본사를 이전하려고 하는 등 인천과 각별한 인연을 만들었다.

김 전 회장은 국내 최초의 경차인 대우자동차 '티코'를 선보이며 마이카 시대를 이끌었다.

대우자동차는 1955년 설립된 신진공업을 모태로 한다. 신진공업은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해 신진자동차로 이름을 바꾼 뒤 1966년부터 인천 부평의 새나라자동차 조립라인에서 세단과 픽업트럭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김 전 회장이 1977년 법정관리중이던 산업은행으로부터 새한자동차 지분을 인수하면서 GM과 50대 50 합작사를 만들면서 대우차의 역사는 시작됐다.

대우차는 출범 이후 80년대 초 고급 중형 세단인 '로얄 살롱' 시리즈와 1986년 소형 스포츠 세단 '르망' 등으로 연속 히트를 치며 현대자동차와 함께 양대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다. 특히 1991년 출시한 티코는 국민차 반열에 올랐다. 정부는 88올림픽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에 맞춰 자동차 보급 계획을 추진했고, 대우차를 국민차 사업 생산업체로 지정했다.

김 전 회장은 1992년 GM과 결별하고 '세계경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며 글로벌 시장 진출을 시도했다.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필리핀, 폴란드, 중국, 루마니아, 러시아, 인도 등 10여개국에 해외 공장 설립을 추진했다. 국내에서는 1996년 수출선적이 유리한 군산산업기지 내에 생산기지를 세웠다. 특히 군산공장 가동을 기점으로 대우차 위상은 달라지게 된다. 김 전 회장은 독자 기술을 개발하기보단, 외부에서 검증된 기술을 사오는 방식으로 사세를 불려왔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무리한 투자와 리스크 관리 실패로 외환위기를 피하지 못했다. 그룹 전체가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계열사 대부분이 매각되는 아픔을 겪은 끝에 결국 2000년 그룹 해체를 맞았다. 대우차 역시 2000년 11월 최종부도 처리되며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2002년 'GM대우'로 바뀌면서 승용차에만 전담하게 된다. 2011년GM대우가 공식 명칭을 지금의 '한국지엠주식회사'로 변경하면서 '대우' 브랜드는 33년 만에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GM대우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대우차는 한국 자동차 산업 태동기부터 활약하며 현대차와 쌍두마차 역할을 했고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차 위상을 알리는 발판을 쌓았다"면서 "틈만 나면 인천내항에서 세계로 수출되는 대우차를 바라보던 김 전 회장의 뒷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그룹 비서실에서 근무하며 지근거리에서 김 전 회장을 보좌했던 인천출신 인사는 "남대문에 있던 대우그룹 회장실 24층에서 6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면서 5분간 보고를 받고 지시하던 김 전 회장의 열정이 오늘날 발전된 대한민국의 원동력이 된 것 같다"며 "인천이 앞으로 동아시아의 중심도시가 될 것이라며 인천으로 대우 본사를 옮기겠다는 결정에 속으로 환호를 질렀던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천지역 소재 대우그룹 계열사는 크게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대우전자, 대우통신 정도였으며 현재 한국지엠(대우자동차), 두산인프라코어(대우중공업), 포스코인터내셔널(㈜대우), 포스코건설(대우엔지니어링)로 면면이 이어 내려오고 있다.

/김칭우·김원진 기자 chingw@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