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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칼럼] 우리나라 최초 극장은 협률사(協律舍)

김승국 노원문화예술회관 관장

2017년 12월 04일 00:05 월요일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은 1902년에 세워진 협률사(協律社)이다.

최초의 민간극장으로는 1908년 세워진 원각사(圓覺社)라는 게 정설로 되어 있다.

협률사(協律社)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극장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협률사는 1902년 고종 재위 40주년 경축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당시 한성부 야주현(漢城府 夜珠峴:현재의 광화문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던 황실건물 봉상사(奉常寺)의 일부를 터서 마련된 2층 500석 규모의 상설극장이었기 때문이다.

1902년 12월 2일에 창립공연작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유료 무대공연인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소춘대유희'는 특정작품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기녀들의 춤과 판소리, 명창들의 판소리, 재인(才人)들의 곡예 등 전통연희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공연이었다. 그러나 3년6개월만인 1906년 4월 25일 문을 닫았다.

협률사가 1906년에 문을 닫자 극장 건물이 한동안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로 사용되다가 1908년 1월 하순 관인구락부가 남대문 쪽으로 이전하자 그해 7월 박정동(朴晶東)·김상천(金相天)·이인직(李人稙) 등이 건물을 임대받아 내부수리를 하고 원각사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극장이 문을 열었다.

원각사는 판소리·민속무용 등 재래 연희를 주로 공연하였고, 때로 판소리를 분창(分唱)하여 창극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극장은 새로운 것을 원하는 시대 추세에 따라 창작창극을 시도하였다.

1908년 11월에는 이인직의 '은세계(銀世界)'를 신연극(新演劇)이라는 이름으로 공연하였다. 1909년 11월 '수궁가' 공연 이후 실질적인 공연 활동은 중단되었고, 이 건물은 점차 공회당으로 변모해갔다.

원각사는 국민회본부사무소(國民會本部事務所)로 쓰였고, 1910년부터는 연설회장과 연회장으로 가끔 대관되었다. 원각사가 1909년 11월 말 폐지되자 전속 명창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우리나라 근대 공연예술사에 가려진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은 1902년 서울 정동에서 문을 연 협률사(協律社)가 아니라, 인천의 부호 정치국(丁致國)이 1895년 인천 경동에 개관한 협률사(協律舍)라는 사실이다. 서울의 협률사와 인천의 협률사는 발음은 같으나 한자(漢子)명이 다르다.

인천의 협률사는 현재 애관극장의 전신으로, 청일전쟁(1894~1895)이 한창이었을 때 지었던 창고를 정치국이 공연극장으로 전용하여 협률사(協律舍)라는 명칭을 붙이게 된 것이었다. 정치국은 부산 출신으로, 1884년 인천에 와서 사업가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인천 내리교회의 존스 목사가 1901년 'The Korean Review' 1월호에 기고한 'The New Century'라는 글에서 "1900년에 들어섰을 무렵 이미 인천에는 3개의 영사관, 2개의 극장, 7개의 은행, 다수의 목욕탕, 수개의 교회단, 수개의 호텔 등이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인천은 우리나라에서 선진문명 국제도시로서 입지를 가진 큰 도시였다고 생각된다.

서울 정동의 협률사(協律社)가 1902년에 설립되었으니까 이미 인천에 2개의 극장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인천의 협률사(協律舍)였다는 이야기다. 2개 극장 중 하나는 1897년 인천에 살고 있는 4000여명의 일본 거류민들을 위안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만든 인천 송학동 인천좌(仁川座)였고, 또 하나는 1895년 인천의 사업가 정치국이 우리 조선인들을 위해 세운 협률사(協律舍)였다.

협률사와 인천좌(1897)에 이어 1905년에 사동에 '가부키좌'가 들어섰고, 이어 1909년에 신생동에 '표관' 등 여러 극장이 세워지면서 지금의 인천 중구의 사동과 경동 일대는 다양한 극단과 예술단체들이 조직되는 등 '연극의 거리'가 조성될 정도로 연극 붐이 일어났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 연극계를 뒤흔들 스타 배우와 극작가 등이 모여들어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경성'보다도 더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인천의 협률사는 이후 '혁신단' 임성구의 제안에 따라 1912년 '축항사(築港舍)'라 명칭이 바뀌게 되는데, 부지 48평을 지닌 2층 건물의 정원 500명 규모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극작가 진우촌·함세덕, 연기자 정암, 무대장치가 원우전 등 기라성 같은 인천 문화계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새로운 애관극장 시대를 준비해갔던 것이다. 그 후 '축항사'는 1926년 영화전용 극장인 '애관극장'으로 다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승국 노원문화예술회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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