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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천재' 국가대표·실업팀서 훨훨 날다

[조준호 한체대 교수 '최관수 선생' 연구]
동산고 재학시절 '4연속 완봉승'
1962년 아시아대회 준우승 기여
창단팀 중소기업은행 정상 견인

2017년 11월 20일 21:08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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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동산고 1학년 야구부 시절,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한 1962년 김성근(왼쪽)과 최관수, 중소기업은행 시절(1965) 최우수선수상을 받는 최관수. /사진제공=오마이뉴스 조종안


지역(인천) 체육사(體育史)를 연구를 통해 인천의 뿌리를 찾는 작업을 꾸준하게 이어가고 있는 조준호 한국체육대학 교수가 인천 출신으로 우리나라 야구계의 거물인 고(故) 최관수 선생의 일대기를 조명한 연구 성과를 내놨다. 조 교수는 올 초 한국체육사회학지를 통해 '역전의 명수, 최관수에 관한 연구'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동안 최관수 선생에 대한 크고 작은 언론 보도는 있었지만 그를 학술적으로 연구해 결과를 논문으로 내놓은 이는 조 교수가 처음이다.

1942년 인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인천 동산고 재학시절 4경기 연속 완봉승 기록을 세운 최고의 투수이자,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는 이영민 타격상까지 수상한 야구의 천재로 평가받는다. 이후 그는 1970년 전북 군산으로 내려가 10년 동안 군산상고 감독을 맡아 호남 야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조 교수는 논문에서 '최관수는 인천과 군산을 넘어 초기 고교야구와 실업야구를 발전시킨 한국 야구의 선구자'라고 표현했다.

조 교수의 이번 논문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최관수 연구 1차 결과인 이번 논문은 고인이 군산으로 내려가지 전까지, 즉 그의 인천동산고 시절 및 중소기업은행 선수 시절의 활약상을 비중있게 다뤘다. 군산으로 가 지도자로서 이룩한 또 다른 성취는 내년에 다시 2차 논문으로 내놓을 예정이다.

-고교 시절 태극마크를 단 최관수
최관수는 창영초등학교와 동산중학교, 동산고등학교를 나왔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공립학교 대신 야구를 할 경우 모든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던 동산을 선택했다.

그는 빼어난 실력 때문에 1년 더 활약한 동산고 재학 4년 동안 무수히 많은 대회에서 팀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1961년 1월 당대 최고의 타자라는 오춘삼(경동고), 백인천(경동고)을 꺾고 제3회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다.

그는 동산을 대표하는 주전 투수였지만 늘 타격에서도 3, 4, 5번을 해왔고 당시 타율이 무려 0.478이었다.

최관수는 1962년 1월 대만에서 열리는 제4회 아시아야구대회에 고교 선수로는 유일하게 선발되는 영광을 누린다. 그는 이 대회 필리핀 전에 선발로 나서 재일동포 김성근(전 SK와이번스 감독)과 함께 13개의 삼진을 합작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당시 우리 대표팀은 그의 활약을 바탕으로 6전 3승3패를 기록, 준우승을 차지했다.

-창단팀을 최강팀으로 이끈 스타
최관수는 4년을 다닌 동산고를 떠나 1962년 당시 창단팀이던 중소기업은행으로 적을 옮긴다. 재일동포 출신 투수 김성근 역시 최관수와 함께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한다.

난공불락 최강의 투수진을 갖춘 중소기업 은행은 1963년 실업 1차 리그 우승, 1964년 실업야구리그 전체 우승을 차지한다.

1965년 팀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그는 투수로서 철도청을 상대로 완봉승 및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등 최고의 기량을 뽐낸다.

이처럼 그는 중소기업은행에서 약 8년 동안 활약하며 국가대표로서, 기업은행 선수로서 국가와 직장의 명예를 드높인다.

특히, 당시 외국팀들과 다양한 경기를 통해 경험한 선진야구는 향후 그가 군산에서 '역전의 명수'란 명성을 얻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영감을 주었을 것이라는 게 조 교수의 분석이다. 


/이종만 기자 malema@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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