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장가가던 날, 말 타고 신부와 첫 만남
▲ 가을이 깊어가면서 선두포 평야 빛깔이 점점 누렇게 변하고 있다.선두포평야에선 이달 하순 본격적인 추수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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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측, 하루 전 신부 아버지에 '혼수함' 전달

'집안일' 위해 서둘러… 여자 평균나이 16~23세

70년 지난 지금은 적령기 33~36세 '비혼시대'로



구불구불한 도로 곳곳에서 만나는 속노랑고구마, 쌀알이 너무 무거워져 수풀처럼 우거진 벼들. 강화도는 지금 온통 '노란물결'로 출렁이는 중이다. 벼가 누렇게 익고, 붉은 홍시가 가을햇살을 머금는 10월은 결혼하기 좋은 계절이기도 하다. 1947년 선두포의 결혼풍속도는 어땠을까.

코넬리어스 오스굿이 바라본 당시 결혼풍속도에 따르면 결혼적령기는 남성의 경우 20살 정도였다.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면 결혼을 서둘러야 했다. 집안에 일하는 여자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선 노동이 가능한 여성이 필요했으므로 신부의 나이가 많은 경우도 있었다. 당시 선두리에 살던 386쌍의 부부가운데 15.28%가 아내의 나이가 많았다. 아내들의 나이는 초혼과 재혼을 포함해서 16살부터 23살까지 다양하게 분포했다.

결혼은 당사자가 아닌 부모들간 약속으로 시작됐다. 아버지가 장남의 결혼을 중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한 지역에 사는 사람이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 등에게 부탁해 신랑이나 신부감을 알아봐 연결시켜 주는 것이 일반적 형태였다.

중매쟁이가 적당한 배우자를 추천해주면 예비신랑의 아버지가 먼저 아들이 태어난 날과 시간이 적힌 사주단자를 들고 신부집으로 찾아갔다. 이로써 공식적인 약혼절차가 이뤄지고 양가의 아버지들은 점쟁이로부터 길일을 받아 결혼식 날짜를 정했다.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중대사가 정작 당사자들은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부모의 결정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된 셈이다.

혼례는 결혼식 전날, 신랑이 가까운 남자친척들과 함께 신부의 마을에 가는 것으로 시작됐다. 신랑은 말을 타고, 친척들은 '혼수함'을 들고 걸어서 갔다.

그렇게 가져간 혼수함은 신부의 아버지에게 전달했다. 혼수함을 전달할 때는 신부 쪽 어린 소년이 신랑측 친척들의 얼굴에 숯을 문지르는 의식을 거쳤다. 혼수함에는 신부를 위한 치마저고리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다음 날 아침 8~9시 빨간색과 초록색으로 장식된 화관을 쓴 신랑은 말을 타고 신부의 집에 도착한다. 신랑이 말에서 내릴 때 마부는 나무로 만들어 색칠한 기러기인 '목안'을 건네준다. 이는 평생 금슬 좋은 부부로 살라는 기원이었다.

말에서 내린 신랑은 초례상 앞에서 세번 절을 하고 혼례가 치러지는 돗자리로 돌아온다. 드디어 시중꾼에 의해 신부가 불려나온다. 쪽두리를 쓴 채 눈을 내리깔고 부끄러워하는 신부와 그런 신부를 훔쳐보며 싱글벙글 웃는 신랑. 이 평생동지들은 서로 맞절을 하고 술을 나눠 마시며 백년가약의 의식을 행한다. 우리가 종종 TV나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전통혼례가 치러진 것이다.

잔치가 끝나면 신랑은 들러리들이 이끄는 말에 올라 신부의 집을 나선다. 신부는 가마에 올라타 이동하고 아버지가 옆에 따라 걸었다. 신부의 집에서 신랑집이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신부가 가마 속에서 오줌을 싸는 일도 있었다. 신랑의 집에 도착한 신부는 시부모에게 세 번 절을 하고 새롭게 창호지가 발라진 신방으로 들어갔다.

첫날 밤을 치른 신랑은 결혼식을 도와줬던 친구들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신부는 결혼 후 3일 동안은 매일 아침 시부모에게 절 하는 것을 제외하곤 어떤 일도 하지 않고 '허니문'을 즐길 수 있었다.

결혼식 뒤 3일째 되는 날 신랑은 처가로 가 장인, 장모에게 정식 인사를 드렸다. 신혼이 끝나면 신부는 시어머니 보호 아래 집안일을 시작해야 했다. 1947년 선두포는 우리나라 전통적 결혼풍습을 따르고 있었다.

70년이 지난 지금 결혼풍속도는 크게 바뀌었다. 대개 결혼을 안 하고 혼자사는 '싱글족'이나 '비혼남녀'가 대세다. 하더라도 매우 늦게 하는 경우가 많다. 한 결혼정보회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결혼 연령은 남성은 36세, 여성은 33세로 나타났다.

결혼을 하고서 아이를 갖지 않는 경우도 많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조사한 우리나라 1가구당 출생아 수는 1.17명에 불과하다. 이는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취업, 연애, 결혼을 포기한 '삼포세대'에 이어 출산과 주택 대인관계까지 포기한 '오포세대'의 등장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70년 전 우리나라의 경제, 사회적 상황이 좋았던 것을 결코 아닐 터이다. 선두포의 가을이 무르익고 있었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강화 토박이 집안' 40대 손 이병희 어르신

"사모관대 하고 20대에 맞은 아내 … 막내 아들은 독신으로 살겠다네"



"나는 결혼을 늦게 한 편야, 군대 갔다와서 20대 후반에 했으니까. 나는 사모관대를 하고 아내는 쪽두리 쓰고 했지."

선두포 토박이 이병희(75) 어르신은 70년대 초반에 전통혼례로 결혼식을 치렀다. 전통혼례이긴 했지만 말 대신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온수리 심도상사에 제무시트럭인가 있었는데 그거 타고 아내가 있는 길직리까지 갔지."

첫날 밤을 치르기 전까지 신부는 아랫목에 앉혀 놓는게 상례였다. 그렇게 앉혀 놓으면 동네사람들이 오가면서 신부를 훔쳐보고 "눈이 시원시원하다" "얼굴이 예쁘다" 등 수군대며 킥킥댔다. 결혼 뒤 그는 슬하에 2남1녀를 뒀다. 딸과 첫 아들은 출가를 했지만 30대 중후반인 막내아들은 독신선언 뒤 혼자 살고 있다.

그는 400년간 조상대대로 강화도땅에서 살아온 강화 토박이 집안의 40대 손이다.

"어려서 마을에서 우리 집이 잘 사는 편이었는데 내가 6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5살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지. 이후 길상초등학교를 나와 쭉 농사만 지었어."

홍역마마 등 전염병 등으로 과거엔 지금보다 훨씬 사망률이 높았다. 선두포엔 영유아의 시신을 묻는 '애청무덤'이라는 곳까지 있다.

"선두포 입구 부근에 있는 야산 같은 곳인데 학교 갔다 올 때 보면 얕이 묻어서 아이를 싼 보자기가 언뜻언뜻 보이기도 했지."

그의 남동생 역시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망했다. 선두포에서 태어나 계모의 중매로 천생연분 유화선(73) 여사를 만나 3남매를 낳고 평생을 살아온 그의 소망은 더도말고 덜도말고 지금처럼 사는 것이다.

"젊어서 직장도 다녀보고 사업도 해봤는데 다 소용없어. 그저 가족들 건강하고 지금처럼 농사 짓고 사는 게 최고지."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