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화상조계(청국조계) 위쪽에 세무사 공관이라는 표시가 선명하다.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1884). /자료제공=서울본부 세관 김성수 연구자
미국과 최초의 통상조약이 인천에서 체결되었다는 사실은 그간 지역 연구자들의 큰 관심거리였다. 따라서 그 체결된 지점이 어디였던가를 두고 몇 가지 의견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국사교과서에서는 '인천 제물포'에서 체결되었다고만 명시하고 있었는데, 1959년경 인천의 한 향토사가가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잡지, (1897년 10월호)와 (1901년 1월호)에 게재된 내리교회 존스목사의 글을 토대로 '화도진'으로 구체화하였다. 그 이후 최근까지 화도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2000년 교회사를 연구하는 인천 연구자가 앞서 자료에서 영문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화도진이 아닌 지금의 올림포스 호텔 아래 초기'해관 근처'에 천막을 치고 조약을 체결한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조약 체결 장소에 대한 실마리는 앞서 책자에 나와 있듯이 '해관 관리관의 사택'이 과연 어디에 있었던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미 같은 책에 아펜젤러목사가 서술한'슈펠트의 회고'(1892. 2)라는 글 가운데 해관 관리관 사택 부근에서 천막을 치고 체결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장소는 처음에 미국이 영사관부지로 선정했다가 해관에 양도했던 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더 정확하게 확인해 줄 수 있는 사진이나 지도 같은 시각적 자료가 필요하던 참에 당시 제물포지도가 2013년 세관에 근무하는 연구자에 의해 발견되면서 지역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이 자료를 통해 확인해 보면, 해관 관리관의 사택은 자유공원 청일조계경계계단 위쪽, 현재 까페가 있는 위치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3개월 후인 1882년 8월에 일본은 조선에 임오군란의 책임을 물어 그 배상을 위해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일본은 임오군란의 후유증으로 수도 한성보다는 유사시에 대피하기 용이한 인천 제물포를 택했고, 조약 체결 장소 역시 앞서 조미조약을 체결했던 곳과 가까운 지점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 위치는 인천개항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과 대불호텔 터 일대이다. 당시에는 빈터였던 이곳에 일본은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그 곁에 천막을 치고 체결하였던 것이다.

조미조약(4.6)에 이어 제물포에서 체결되었던 영국(4.21), 독일(5.15)과의 조약도 그 체결 장소가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조영조약 체결의 광경이 담긴 삽화를 통해서 이 부근에 천막을 치고 맺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인천에서 체결되었던 조약들은 그 장소가 대략 지금의 자유공원으로 가는 청일조계경계계단 부근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50여년만에 새로운 자료 발굴을 통해 기왕의 사실을 재정립한 것은 역사의 존재 의미이다. 자료가 발굴되지 않았으면 우리는 계속 미궁 속에서 정확한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아울러 서구와 맺은 최초의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상징으로서 태극기가 처음 게양되었다는 사실도 발견하였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현재 두 가지의 과제가 남겨졌다. 현존하는 2개의 표지석과 새로 검증된 1개의 표지석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최초의 태극기 게양지로서의 인천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 하는 일이다.
30여년전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화도진에 세워졌던 표지석도, 10여년 전 2007년 파라다이스 호텔 내에 설치되었던 표지석도 당시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근거이자 사례이다.
이 때문에 혹자(或者)는 잘못된 표지석은 모두 정리하는 것이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이러한 일이 일어났던 시말(始末)을 적은 안내문을 표지석 옆에 별도로 설치하자고 한다. 분명한 것은 지난 50여년간 우리가 고민해 왔듯이 후손들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과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역사(歷史)' 라는 글자의 뜻을 풀이해보면 그 속에 해답이 있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