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호 건축그룹 [tam] 대표
무심코 지나가 버리는 시간은 그대로 사라질 것 같지만, 어디엔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어떤 사건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수도 있고, 특정 장소에 얽힌 기억이 추억으로 그 장소와 동일시될 수도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 장소는 그 시간이 물리적인 흔적으로도 남는다. 그리고, 그 흔적은 극히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많은 사람이 살다 간 도시는 그 무수한 흔적 중에서 시간이라는 장치를 통해 걸러진 것이 남겨진다. 지금도 수많은 것이 시간이라는 장치 속에서 나름의 모습으로 걸러지고 있다. 도시에 사는 한 명의 사람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평범하고 단순한 것들이 도시라는 큰 그릇 안에서 뒤섞이게 되고, 이것들이 도시를 끊임없이 변화하게 만든다. 그렇게 도시는 유기체가 된다.

대부분 비슷한 모습인 대규모 계획도시의 밋밋함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의 작은 차이들이 생겨난다. 도시 전체의 인구에서부터 용도별로 명확하게 구분된 토지이용계획과 각각 토지의 건축규모까지 결정된 계획 도시조차도 기존 도시들에 비해 그 변화의 폭은 크지 않았지만, 나름의 작동방식을 만들어 냈다.

이런 작동 방식에 의한 차이는 바로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평범하고 단순한 일상의 삶이 만들어낸 것이다. 건물이 지어지고 나서 2~3년 안에 사라지는 것들은 없다. 최소한 20~30년은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과 직접 부대낀다. 도시라는 큰 틀에서는 보잘것없는 듯한 작은 변화들이 건축에서는 더 크게 다가온다. 도시와 건축이 시간 속에서 크고 작은 변화를 겪지만, 가장 크게 겪는 변화는 바로 '낡음'이다. 여러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들 안에 담기는 내용물은 때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것을 담는 그릇은 큰 변화 없이 그대로이다. '낡음'이다. 물건이라면 새 것으로 바꾸면 되지만, 도시와 건축은 낡았다고 바로 새 것으로 바꿀 수 없다. 지금까지 대규모 재개발이나 재건축 사업을 통해 이런 낡은 것들을 한꺼번에 새 것으로 바꾸곤 했다. 대규모 개발을 위한 계획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까지 꼼꼼하게 챙길 정도로 세심하지 못하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무시되기 쉬운 대규모 계획들이 가져오는 결과가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다.

유럽으로 여행을 가본 사람들은 각각의 도시들이 가진 매력에 취하게 된다. 그 매력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나열되지만 그 중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고풍스러운 도시, 건축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거리의 모습이다.

수백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건물의 1층 카페 테라스에 앉아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하고 있으면 나도 이 여유로운 사회의 구성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된다. 유럽인들의 삶이 우리보다 여유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평범한 거리의 카페 테라스에서의 느낌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파리는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 남작의 파리개조사업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 도시였지만, 100여 년의 시간이 쌓이면서 지금의 멋스러움을 뽐내고 있고, 우리에게 가우디의 도시로만 알려진 바르셀로나는 비슷한 시기에 고딕지구와 그라시아 사이에 세르다가 계획한 신도시로 마찬가지로 100여 년의 시간이 쌓여 사람들을 끌어 들이고 있다. 시간을 담은 건축과 도시가 그 곳에 사는 사람들 속에 녹아 들어 스스로의 매력을 발산시키려면 최소한 100년은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도시와 건축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간의 가치를 배제시켰다. 기능, 효율, 편의 혹은 편리성, 경제적 가치 등의 기준 외에 도시와 건축에 요구하는 것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 외의 것들이 더 크게 자리잡은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을 동경하는 모순이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옛 애경사 건물이 헐렸다. 오랫동안 빈 공간으로 남아 있던 곳이 송월동 동화마을 관광객이 급증하자 마침 주차장이 필요했던 구에서 아무 쓰임이 없던 이곳을 주차장으로 만들려고 헐었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건축과 도시에서 시간이 배제된 사례인 셈이다.

물론 지금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방법이 의미 있는 장소를 없애는 것만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는 무슨 답을 할 수 있을까? 굳이 그곳에 주차장을 만들어야 한다면, 건물을 보존하고 마당을 주차장으로 활용하면서 건물의 의미를 살려주는 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정말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기에 서울과 근접한 항구라는 특징으로 인해 다양한 것들이 태동한 도시이다. 그런 다양한 시도들이 녹아 들어 있는 건축이 그 가치가 절하된 채 도시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구도심을 '낡음'으로만 바라보고, 도시를 새롭고 편리한 것들로만 채워 나가려고만 한다면 인천이라는 지리적 특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건축과 도시의 모습은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인천이 그런 매력 없는 도시가 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