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은 사활적 이해를 걸고 크리미아 반도에서 격돌했다. 이것이 크리미아 전쟁(1853~1856)이었다.
애로우사건이라 부르는 제2차 아편전쟁 역시 그 배후에는 중국 진출을 꾀하는 러시아와 이를 견제하려는 영국의 갈등이 녹아있었다. 이 전쟁을 통해 영국은 중국의 내륙 항로와 해안을 차지했고, 러시아는 신장성의 이리(伊犁)분쟁에 개입해 중국의 변경을 탈취했다. 중국이 서북 변경의 분쟁으로 혼란해지자 영국의 외교적 동맹이던 일본은 중국의 동북 변경인 조선을 강제 개항했고, 류큐(琉球, 오키나와)를 병합했다. 비록 고종 황제와 조선의 지도자들은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열강들의 그레이트 게임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지만, 독자적 외교노선을 구상하던 고종은 먼저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절했고, 조선은 러시아와 밀약을 맺었다.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조선의 몸부림은 결과적으로 부동항 획득이라는 러시아의 오랜 숙원을 달성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 이 무렵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하던 영국은 조선에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거문도를 점령했다. 이것이 이른바 거문도 사건의 전말이었다. 그로부터 130년이 흐른 오늘, 제주 강정과 성주에 미국의 군사력이 배치되려 한다. 이것이 진정 국익에 부합하는 일인지, 이 땅의 정치인들은 국가와 민족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
/황해문화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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