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태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 <여지도>에 나타난 자연도(영종도), 구운사(구담사), 태평루이다. 썰물일 때 인근의 섬들이 영종과 연계되기에 갯벌 영역에 조퇴성륙(潮退成陸)으로 표시해 놓았다.






이곡(李穀, 1298~1351)은 고려 말엽의 학자다. 한산 출생으로 호는 가정(稼亭), 한산이씨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이다.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며, 이색(李穡)의 아버지다. 가전체문학에 해당하는 '죽부인전(竹夫人傳)'을 비롯해 많은 시편을 지었다. '가정집(稼亭集)'을 남겼다. 다음의 시는 1329년 예성강에서 배를 타고 고향 한산으로 가는 길에 강화도를 거쳐 자연도에 도착한 것과 관련돼 있다.

<자연도에서 차운하다(次紫燕島)>
가는 도중에 자연도에 들러
노를 두드리며 한가로이 읊조리네
갯가의 뻘은 전서(篆書)처럼 구불구불하고
돛대는 비녀처럼 배 위에 꽂혀 있네
소금 굽는 연기는 가까운 물가를 가로 지르는데
바다의 달은 저 멀리 산 위로 솟아오르네
조각배의 이 흥치 나에게 있는데
어느 해에 다시 찾아오려나

고향을 향하는 마음은 흥겹기만 하다. 시선을 수평이건 수직이건 어디로 두더라도 포착된 것들은 흥을 돋우는 대상들이다. 구불구불한 갯고랑과 비녀처럼 꽂힌 돛대, 물가를 가로 지르는 소금 굽는 연기와 산 위로 솟아오른 달이 그것이다. 시선이 수평에서 수직으로 바뀜에 따라 갯벌 →돛대, 연기→달이 차례로 등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달은 저 멀리 산 위로 솟아오르네'에서 '산 위'와 '달'은 모두 수직의 시선에 의해 거듭 포착된 것들이다. 그래서 '어느 해에 다시 찾아오려나'는 당시의 거듭된 흥치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진술이다.

<제물사에 묵으면서 벽 위의 시에 차운하다(宿濟物寺 次壁上韻)>
선왕은 은혜를 남기시어
이 정자에 제물이란 편액을 내리셨네
달 뜨니 천지가 온통 흰빛이다가
구름 걷히자 섬들이 푸른빛이네
이끼로 뒤덮인 옛 벽돌담과
늙은 잣나무 그늘 드리운 마당이 있네
붓을 쥐었다가 다시 그만 것은
하늘이 아껴 두어 쉬이 보여주려 하지 않아서이네

제물사의 부속 건물에 해당하는 제물정(濟物亭)에서 그곳의 내력과 소회를 읊고 있다. 제물정에 편액을 내린 자는 충선왕이었으며 그곳에서 주변을 조망하니 하늘이 아껴두었던 비경이 나타날 것 같다고 한다. 뭔가 대단한 비경이 나타날 듯해 시화(詩化)하려고 붓을 쥐었다가 그만둔 것은 이런 사정과 관련돼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자의 시선이 천지[乾坤]→섬→벽돌담→마당의 순서로 이동하면서 대상의 색깔도 점차 바뀌고 있다. 흰색, 푸른색, 이끼색, 잣나무 그늘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달빛이 만들어낸 잣나무 그림자가 시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것과 달빛의 조도(照度)에 따라 대상들의 색깔이 조금씩 바뀌는 모습을 천간(하늘이 아껴둔 비경)으로 여겼던 것이다.

참고로 자연도에 있었던 경원정(慶源亭)은 고려의 예성강(禮成江)과 중국의 등주(登州)를 잇는 서해 연안해로에 설치된 객관(客館)이었다. '고려도경'에는 "산에 의지해 관사를 지었는데(爲館), 방(榜)에 경원정이라고 하였다"고 기술돼 있다. 부근에 있었던 제물사(濟物寺)는 사신으로 왔다가 자연도에서 죽은 송밀(宋密)에게 반승(飯僧) 의식을 하는 곳이었다. 자연도에 머물던 선원들이 항로가 편안해지기를 바라며 의식을 치렀던 곳이 제물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