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중구 내동 83번지 인천감리서 터. 백범 김구는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고, 그의 모친 곽낙원 여사는 인천감리서 문 앞에서 옥바라지를 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옥살이로 인연맺어 … 귀국후 지방순회때 가장 먼저 찾아와

"(대한)민국 28년(1946)을 맞이하자 나는 38선 이남 지방 순회를 시작했다. 제1차로 인천을 순시했는데,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은 1945년 11월 말 감격 속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지 햇수로 27년 만이었다.

이듬해 백범은 지나온 자취를 떠올리며 각지를 돈다. '백범일지'에 적은 것처럼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인천이었다. 백범은 "지난 일에 대한 감회를 금할 수 없는 인천 순시는 대환영리에 마쳤다"고 했다.

백범은 스무살이던 1896년 일본인 무장 조직원을 살해한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감리서 감옥에 갇힌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1898년 3월 탈옥했다. 1911년부터 다시 서대문감옥에서 옥살이하다가 3년 뒤 인천감옥으로 이감된다. 백범은 "탈주했던 그 감옥을 다시 철망에 얽히어 들어가니 말없는 감옥도 나를 아는 듯, 내가 있던 자리는 옛날 그대로 나를 맞아주었다"고 떠올렸다.

백범에게 인천은 부모와의 추억이 서린 곳이다. 황해도 해주에 살던 백범의 부모는 김구를 따라 인천에 터를 잡았다. 그의 부친 김순영은 책을 넣어주고, 구명 활동에 발 벗고 나섰다. 모친 곽낙원은 객줏집에서 일을 도우며 옥바라지를 했다.

▲ 백범 김구

백범은 당시를 회상하며 "어머님은 옥문 앞까지 따라오셔서 내가 옥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며 서 계셨다"며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 감개무량했다"고 '백범일지'에 적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난 1997년 남동구 장수동 인천대공원에는 백범, 곽 여사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인천감리서는 지금의 중구 내동 83번지 일대에 있었다. 고 신태범 박사가 쓴 책 '인천 한 세기'(1983)에는 "백범 선생께서 1898년 탈옥에 성공하기까지 2년 가까이 감리서 옥사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을 무렵에 자당 곽씨께서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바로 영문 앞 집에 몸을 담고 계신 일이 있었다"고 나온다.

당시 인천감리서 문은 인천항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곽 여사가 옥바라지했던 집은 현재 공영주차장이 있는 중구 신포로 46번길 주변으로 추정된다.

최근 인천감리서 도면 발굴을 계기로 인천에선 백범 재조명 바람이 불고 있다. <인천일보 8월11일자 1·3면> 인천시는 백범이 남긴 유무형 자산을 전수조사하기로 했다. 지난해부터 '인천 가치 재창조' 사업이 벌어졌지만 인천의 독립운동사 발굴은 소외돼 있었다.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은 "백범 선생이 옥고를 치르고 축항 공사장에서 노역을 하셨는데도 연구와 기념 사업에 부족했던 게 사실"이라며 "강제 노역을 나가며 백범 선생이 걸었던 지금의 인천 중동우체국 주변 길에 흉상을 세워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인천감리서, 개항장재판소와 감옥 갖춰... 김구 두번 수감

▲ 백범 김구가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른 인천감리서의 옛 모습. /사진제공=인천시

백범 김구가 옥살이했던 인천감리서는 개항장 사무를 관장하던 기관이다. 1883년 동구 화도진에 설치됐고, 이듬해 중구 내동으로 옮겨졌다. 인천감리서는 행정·통상·사법을 총괄했다. 개항장재판소와 감옥도 갖추고 있었다.

백범은 1896년 일본인을 살해한 '치하포 사건'으로 해주옥에 투옥됐지만 같은 해 인천감리서로 이송된다. 인천 개항장재판소가 주변 지역에서 발생한 외국인 관련 범죄까지 함께 다뤘기 때문이다.

인천감리서는 교육·경찰 기능까지 맡았다. 하지만 일제가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고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인천감리서는 폐지됐다. 감리서 업무는 통감부 인천이사청(지금의 중구청 자리)으로 넘어갔다. 일제가 지방의 행정권까지 장악한 것이다.

그 이후로 감리서 건물은 감옥과 관사로 쓰였다. 백범이 인천에서 두 번째 수감 생활을 한 것도 이 무렵이다.

감리서 건물은 1930년대 중반 법원·검찰 신축으로 허물어진다. 해방 이후 대한준설공사가 쓰던 이 건물마저 1996년 아파트에 자리를 내준다.

지금은 인천감리서 터임을 알리는 팻말만 남아 있다. 

▲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 "인천감리서 감옥 도면 향토사연구 활용 자료"

▲ 손장원 인천재능대 실내건축과 교수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인천 감옥 도면이 처음 발견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백범일지'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김구 선생과 감옥 도면의 상관성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최근 손장원 인천재능대 실내건축과 교수는 국가기록원 자료를 보다가 '인천분감 증축급모양체지도(仁川分監增築及模樣替之圖)'를 찾아냈다. 1910~1912년 무렵 일제가 경성감옥 인천분감을 증축하려고 만든 도면이다. 감옥의 구조와 배치, 건축적 특징 등을 연구한 그는 백범이 두 차례 옥고를 치렀던 인천감리서와 인천 감옥 도면이라고 확신했다.

손 교수는 "'백범일지'에는 증축된 감옥을 백범이 예전과 비교하는 대목이 나온다"며 "증축 공사로 감방은 당초 3개에서 10개가 됐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을 처벌하려고 감옥 규모를 늘려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 교수는 "이 도면에는 조선시대 전통 형태인 인천감리서 감옥과 일제강점기에 신축된 감옥의 평면도와 입면도 등이 모두 수록돼 있어 근대 건축사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며 "백범 연구는 물론 인천 향토사 연구에도 활용할 수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글·사진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