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평 인천 고잔고 교사
▲ 신장 위구르의 투루판에 있는 이슬람교 사원. 이슬람교를 회교라고 하는 이유는 중국의 회족들이 믿는 종교가 이슬람교이기 때문이다.

기원후 6세기경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교는 무함마드 사후 그의 후계자인 칼리프의 시대를 거치며 대대적인 정복활동에 나선다. 동쪽으로는 651년 사산조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이후 중앙아시아로 진출해 751년 당나라 군대와 벌인 탈라스 전투(고구려의 후예로 유명한 고선지 장군이 당 군대의 지휘관이었다)에서 승리함으로써 위구르족이 사는 중국 서부 신장까지 세력을 떨친다.

서쪽으로는 639년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아프리카 북부해안을 거쳐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711년 이베리아반도의 서고트왕국을 정복함으로써 출현한지 채 100년도 안 돼 거대한 이슬람 제국을 이룩했다.

어떤 사람들은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란 말을 언급하며, 이슬람교가 전쟁과 폭력을 일삼는 종교인 양 비난하곤 한다. 19세기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이슬람 세력이 급성장한 비결은 무력을 앞세워 개종을 강요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무지비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신앙을 칼로 강요한 적이 없으며, 이슬람 전파를 위한 무력사용을 부추기는 내용을 '꾸란'에서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꾸란'에서는 "종교에는 어떠한 강요도 있을 수 없다"라며 신앙의 자유를 강조한다.

이우평 인천 고잔고 교사
이슬람교도에게는 이슬람교를 수호하고 확대시키기 위한 성전(聖戰)의 의무(지하드)가 주어진다. 이슬람교가 유라시아 일대에서 광범위한 정복전쟁을 벌였지만 이는 이슬람교를 확대시키기 위한 성전이었을 뿐 피정복민에게 종교적 박해와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당시 서방의 비잔틴 제국이나 동방의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의 지배 아래서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들은 이슬람의 진출을 반겼다. 납세의 의무만 지면 피정복민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풍습 및 전통을 그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짧은 시간에 피정복민의 커다란 저항과 반발 없이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칼이 아니라 이슬람이 지닌 종교적, 문화적 포용력 때문이었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란 말은 이슬람 세력의 확장에 위기감을 느낀 서구 기독교 세력이 만들어낸 망령에 불과하다. 이슬람교를 무자비한 종교로 매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이슬람교에 대해 혐오감과 반감을 갖게 하기 위해 이슬람의 호전성과 종교적 강압성으로 이슬람교를 포장한 것이다.

이슬람교는 창시된 지 불과 100여 년 만에 교세를 급속도로 확장하면서 세계 종교로 발전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한손에 칼, 한손에 꾸란'이란 말이 만들어진 것은 이슬람 세력의 지나친 확장을 두려워했던 서구 기독교 세력이 만들어낸 망령에 불과하다.

팁글 : 이슬람교를 회교라고 부르는 이유

이슬람교를 한자어로는 회교(回敎)라고 한다. 중국 신장 위구르를 비롯해 간쑤성, 산시성 지역이 이슬람화된 것은 751년 당나라가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의 사라센제국에 패하면서부터다.

14, 15세기 이들 지역에 정착한 터키계 기마민족인 돌궐 족(투르크 족으로 위구르 인을 말함)은 중국의 이슬람교도와 결혼했는데, 중국에서는 이들의 자손을 회족(回族)이라 불렀다. 또 이들 모두가 이슬람교도였기 때문에 이들이 믿는 이슬람교를 회교라고 불렀다.

이슬람교는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믿는 세계종교다. 이렇게 국제성을 띤 이슬람교를 소수 민족의 이름을 따서 회교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1644년부터 청조의 반이슬람 정책이 260년간 이어져 박해와 탄압으로 많은 회족이 죽었다. 현재 신장 위구르 지역의 회족은 중국 정부를 상대로 분리 독립을 시도하고 있다. /이우평 인천 고잔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