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계숙 새누리당 동두천시의원

TV '다시보기'로 모 방송사의 '불후의 명곡' 고(故)김정호 편을 시청했다. 가수 김정호(1952∼1985)는 많은 이들에게 아련한 슬픔을 남기고 33세의 나이로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그는 폐결핵을 앓았다. 그 병 때문에 인천과 인연이 닿았다.

'이름 모를 소녀' '하얀 나비' 등으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김정호는 1980년 인천결핵요양원(현 인천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곤 4개월 만에 그곳을 뛰쳐나갔다. 치료 받다 다시 뛰쳐나가기를 수 차례, 피를 토하며 오선지에 음표를 그렸다. '고독한 여인의 미소는 슬퍼'는 그때 만든 곡이다. 요양원 시절 송도 인근 해변을 걷던 여인에게서 느꼈던 슬픈 이미지를 담은 노래다.

인천결핵요양원은 1938년 세워졌다. 남한에서는 두 번째다. 조선적십자사는 결핵요양원을 설립하기 위해 전국의 물 맑고 산 좋은 곳을 뒤졌다. 인천부 문학면 연수리 구릉지가 낙점됐다. 당시 이곳은 접근이 쉽지 않은 오지였다. 순전히 환자와 보호자를 위해 수인선 기차는 송도역과 남동역 사이 역사도 없는 임시정거장에 1분간 정차했다.

갈 곳 별로 없던 80년대 초, 필자는 가끔 이 요양원으로 데이트하러 갔다. '폐병 환자의 수용소'라는 인식으로 접근을 기피했기 때문에 오히려 호젓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동인천에서 버스로 1시간 넘게 걸렸다. 큰길에서 입구까지 긴 오솔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내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핏기 없는 환자들이 연못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는 모습을 자주 봤다. 어쩌면 그들 속에 김정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천결핵요양원은 환자가 줄어들고 연수신시가지가 개발되면서 1996년에 문을 닫았다.

김정호는 광주에서 태어나 외가인 담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두 지역에 이미 노래비가 세워졌고 매년 추모음악제가 열린다. 병마와 싸우며 마지막 창작 혼을 불사르며 불후의 '명곡'을 탄생시킨 장소도 고향 못지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천결핵요양원과 김정호의 흔적을 더 '발굴'해 인천이야기의 또 다른 장면으로 활용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날 '불후의 명곡'에서는 시나위 보컬 김바다가 부른 '고독한 여인의 미소는 슬퍼'가 2위를 차지했다.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