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인하대 강사
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인하대 강사

길 건너 이웃집에 허구헛날 행패만 일삼는 건달이 하나 살고 있다. 처 자식 부양일랑 애시당초 관심도 없고 어쩌다가 눈이라도 한번 마주칠라하면 시비를 붙자 한다. 이런 작자가 하필이면 내 집 앞에 살고 있으니, 매일 아침 집을 나서려면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 어찌해야 할까?

그래도 한때는 괜찮았던 적도 있었지 않느냐며 어떤 이들은 가끔씩 떡이라도 가져다주며 잘 지내보라 하지만 지금은 그런다고 해서 별반 나아질 것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또 어떤 이들은 아예 본때를 한번 제대로 보여주라 하지만 그것도 썩 내키지 않아 망설이는 중이다. 얼마 전에 크게 한번 사단이 난 이후로는 벌써 5년째 우리집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는 있지만, 난 아직도 저쪽에서 먼저 사과하기 전에는 추호도 용서해줄 마음이 없다.

그런데 엊그제 난데없이 우리집으로 돌맹이 하나가 날아들었다. 딱 봐도 앞집에서 날아온 돌임에 틀림이 없어 보이는데, 앞집 사람은 짐짓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유리창이 깨지고 온 집안이 아수라장이 됐다. 더 이상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이거 뭐하자는 거냐고 큰 소리를 쳤더니, 아예 제대로 한판 붙어보자고 덤벼든다. 어찌해야 할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일가 친척들은 저런 망나니 같은 녀석을 그냥 두느냐며 당장에라도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가라 부추긴다.

마음 같아서는 앞뒤 안 재고 그냥 세게 한방 먹이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닌 것 같다. 따로 만나서 얘기 좀 하자는 바람에 일단 그냥 넘어가기는 했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내탓 네탓을 떠나서 무엇보다 이런 어정쩡한 관계가 계속가는 게 마뜩하지도 않다. 난 정말 어찌해야 할까?

국제정치적으로 '평화(peace)'를 정치적 단위 혹은 행위자들 간의 대립적인 폭력의 형태가 일정기간 지속적으로 지양(止揚)된 상태로 규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평화는 다분히 상황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더구나 평화가 즉자적(an sich)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관계성의 측면에서만 규정가능한 대자적(fur sich)인 개념이라고 본다면, 국가 혹은 상호 대립하는 정치적 집단 간의 상황적인 관계적 속성(situational-relational attribute)에 기인하는 부차적인 산물일 수 있다.

규범적으로 평화는 지향되어야 할 가치(value)이며 추진되어야 할 실천적 과제임에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상호간 이익의 교환이나 갈등의 조정의 포함되는 반면 사적 이익의 극대화 혹은 이익의 추구에서 비롯되는 분쟁과 갈등, 대립과 반목이 또한 내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평화와 분쟁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관계적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관계적 속성을 좌우하는 문제의 핵심은 결국 '이익의 분할'에 있을 수 있다.

이익의 분할과 배분은 언제나 긴장과 갈등의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태에서 상호간의 암묵적인 협약이나 묵시적인 동의에 의해서 일시적인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과 평화의 결정은 여전히 상황적이며, 개별자 상호간의 전략적인 관계적 속성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다. 평화는 도달되어지는 단계가 아니라 관리되어져야 할 상태다.

60년의 세월이 넘도록 '전쟁상태'를 종결짓지 못하고 정전(停戰)을 유지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평화는 여전히 묵시적이거나 암묵적이거나 일시적으로 상황적인 상태에 머물러있다. 상호간의 전략적인 관계적 속성을 좌우할 이익의 분할은 이 지역에서 미국과 중국과 일본이 형성하는 관계적 질서에 의해 제한적이다.

평화가 담보하는 가장 큰 이익은 평화임에 틀림없지만, 한반도의 특수성은 좀처럼 이를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여전히 안보관리는 지속적이어야 하고, 평화관리는 상황적인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종전(終戰)선언이나 평화체제 구축이 당장에 실현가능한 부분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북한의 사과가 먼저냐 5·24해제가 먼저냐 같은 현재적인 문제를 두고도 관계개선의 여지를 굳이 좁힐 이유가 없다.

현실적으로는 5·24가 실효적으로 북한을 제재할 수단이 됐는지도 여전히 의문이지만, 무엇보다 관계를 전환하는 데 있어 '전제'를 앞에 둔다는 것은 다분히 모순적이다. 포용과 아량은 더 가진 쪽이 그렇지 못한 쪽에 베푸는 것이다. 어렵게 재개된 남북관계, 대화의 물꼬가 이어져가길 기대한다. /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인하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