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학예팀장
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학예팀장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아티스트 김○○입니다." 몇 년 전 서울문화재단에서 주최한 국제심포지엄에 발제로 나선 예술가의 발칙한 첫 인사말이 기억난다.

언제부터 대한민국에 국가대표 예술가가 생겨났는지 모르겠지만 공개적인 심포지엄자리에서 이처럼 스스로를 수식하다니 그 용기 하나는 가상했다. 일순간 웃음바다가 된 장내의 분위를 다잡으려는 듯 멋쩍은 웃음을 띤 그는 자신이 '커뮤니티 아트'를 한다고, 아니 남들이 그렇게 부르더라고 밝혔다. '남들'이라니, 스스로 뭘 했는지도 모르는 자가 바로 자타공인 '커뮤니티 아티스트'이다.

'커뮤니티 아트'는 몇 년 사이 아주 친숙한 예술의 장르가 됐다. 최근 곳곳에서 전시가 열리는가 하면 '수상'을 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심지어 유행처럼 '커뮤니티와 예술'이란 주제로 여기저기서 세미나, 포럼, 심포지엄까지 열린다.

온라인 포털을 검색 해봐도 아직, 사전적 정의조차 되지 않은 것이 이렇듯 친숙하게 불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이 이것으로 인해 우리를 열광하게 하는가. 이것이 예술의 최전선에 놓인 아방가르드라서 혹은 지금의 예술계를 평정할 새로운 대안으로서 제시된 예술이기 때문인가.

지역을 바탕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생활문화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 '커뮤니티'이다. 그리고 이것의 후미에 '아트'를 봉합해 완성한 것이 커뮤니티 아트다. 문자 그대로 해석해보니, 공동체 예술이나 소통의 예술쯤으로 해석 된다.

과거 정책주도형으로 시도했던 '아트인시티'나 '마을미술프로젝트', '예술마을만들기'가 있었지만, 이들은 공공디자인 내지는 벽화, 공공조형물사업의 성격이 강한 마을재생사업의 일환이었다. 지역을 기반으로 공동체에게 예술을 수혜했지만 결국 이들은 공동체의 다수를 관람자로 설정하는 기존의 수동적 예술참여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반해 커뮤니티 아트를 쉽게 풀어보면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면서 예술을 행하는 것. 생활문화공동체 안에서 예술적 실험을 하는 것. 공동체를 관람자가 아닌 직접참여자로 변신시키는 것. 지역이라는 장소특정성을 활용한 예술. 결과물이라는 성과 위주가 아닌 주민참여를 통해 이들의 삶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질적 가치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공공미술과 차별을 갖는다.

미국의 학자인 '수잔 레이시'는 그의 저서에서 이러한 형태의 예술을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이것은 오래되고 소외된 공동체로 파고드는 특성을 지닌다. 새로이 건설된 도시에서 넘쳐나는 문화콘텐츠나 개인적인 취향으로 단절된 공동체에서는 불가능한 예술의 형태다.

그래서 이것은 낙후된 재래시장으로 농촌으로 다문화로 나환자촌으로 수몰지구로 파고들었다. 이들은 필요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공동체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성찰이 있었기에 가능한 자연발생적 커뮤니티 아트이다. 긍정적인 사례로 경기도 포천의 '도롱이집프로젝트', 안양의 '석수시장프로젝트', 수원의 '인계시장프로젝트'등을 들 수 있으며, 지금도 다양한 공간에서 다각도의 커뮤니티 아트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유행처럼 '커뮤니티 아트'를 자신들의 기획을 꾸미는 재료로 활용한다는데 있다.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고 윤리적인 공동체를 이루는데 너도나도 이것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커뮤니티 아트는 고유명사이기 이전에 행위를 짐작케 하는 동사적 특성을 갖는다. 다분히 설명적이며 쉽게 정의되지 않는 모호성을 지닌다는 말이다.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최대의 이유는 공동체의 특성과 다양성에 따라 모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인데, 앞서 이것을 새로운 형태의 공공미술이라 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이것이 기존의 마을재생, 공공디자인처럼 공공장소에 놓인 미술(벽화, 조형물, 공공디자인)따위로 곡해되지 않고 예술가와 참여자(지역주민)의 행위와 과정자체가 인정되는 열려있을 때 진정한 '커뮤니티 아트'로 바로 설 것이다. /조두호 수원미술전시관 학예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