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객원교수

얼마 전 국내 한 언론사가 창간기념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한국인의 장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설문에 두 가지씩 답을 써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근면, 인내, 단결, 예의' 등 네 가지가 맨 윗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 국민이 비록 실천은 못해도 무엇이 소중한 가치인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아마도 우리 국민은 이들 네 개의 덕목이 한국인의 장점이라고 믿고 싶은 희망을 여론조사에서 응답으로 내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서 여론조사는 믿을 것이 못 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사람들이 솔직하게 대답하기보다 모범답안을 제시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리나라 여론조사 결과는 실제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 일이 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입니까'라고 물으면 거의 대부분은 아니라고 대답하기 때문에 진심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번째 질문을 만들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러면 당신 딸이 타인종과 결혼하는 것에 찬성합니까'라고 물으면 '아니오'라는 대답이 많이 나오는데 그 응답에서 학자들은 여론의 진심을 캐낼 수 있다고 말한다.

어쨌거나 '근면, 인내, 단결, 예의' 등 우리 국민이 뽑은 한국인의 장점 네 가지는 공감할 수 있는 덕목들이다. 우리 민족이 부지런하고 참을성 많은 것은 개발경제 시대를 돌이켜 보면 증명되는 것이니 제쳐두자.

단결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내부적으로 정신없이 싸우다가도 예컨대 일본과 갈등이 생기면 순식간에 단합하여 대응하고,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제적 행사를 주최할 때는 그야말로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무난히 끝을 맺는다. 그러면 <예의> 하나가 남는데 이것은 과연 우리가 장점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미국의 한 TV방송사가 세계 25개 대도시 시민들의 친절도와 예절수준을 조사하기 위해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취재를 한 적이 있다. 조사는 그 도시의 대형 건물을 하나 골라 현관문을 먼저 열고 들어간 사람이 다음 사람을 위해 문손잡이를 얼마나 자주 잡아주는가 하는 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1등을 한 뉴욕은 무려 97%의 사람들이 다음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했고 뒤따르는 사람이 있으면 100% 손잡이를 잡아준 것으로 나타났다. 근소한 차이로 런던 도쿄 취리히 등이 그 뒤를 이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은 안타깝게도 25개 도시 중 24위 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서울은 다음 사람이 들어오고 있는지를 뒤돌아보는 경우가 100명 가운데 6명꼴 밖에 안 됐고 전체 출입자 가운데 3%만이 다음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 주었을 뿐이다.

더 부끄러웠던 점은 다음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기는커녕, 앞 사람이 열고 들어간 문틈으로 얌체처럼 재빨리 따라 들어가는 바람에 되돌아 온 문에 뒷사람이 무방비로 부딪치는 경우가 네 건이나 발생했다는 것이다. 조사 대상으로 선정된 대형 건물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교육수준이 국민전체 평균보다 높았을 터인데 그들이 이렇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인내, 자제, 양심, 교양 같은 단어들은 스스로를 향한 '내부적' 개념들이다. 그리고 예의, 친절, 배려, 헌신 같은 단어들은 남에게 베푸는 '관계적' 덕목들이다. 이들 두 그룹의 가치들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상호작용을 한다.

교양이 있는 사람들은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남을 배려하는 성향이 강하다. 이런 덕목들 가운데서도 양심은 모든 의식의 출발점이다. 양심이 있으면 예의와 친절은 저절로 따라온다. 인천의 제물포 고등학교가 일찍이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 선언하고 무감독 시험의 전통을 지켜온 것은 개교 당시 교육자들이 양심의 가치를 간파하고 이를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숨을 쉬고 그럴 능력이 있는 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 보시오, 당신은 아테네인이오. 당신의 도시는 그리스에서 가장 위대하며 지혜롭고 강력하기로 그 명성이 자자하오. 그러나 당신들은 부와 명예와 명성은 그렇게 많이 차지하려고 안달하면서도 우리의 정신적 혼을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당신들은 부끄럽지도 않소'라고 지적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도 한 번 소크라테스를 흉내 내 스스로들에게 이렇게 말해 보면 어떨까. "여러분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전자제품들을 만들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복잡한 선박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교육열로 대학 진학률이 OECD국가 가운데서 단연 앞서는 문화민족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던 시절 동방예의지국이라던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된 지금, 예의와 친절도 조사에서 세계 최하위 수준이 된 것은 부끄럽지 않습니까".

누가 누구를 나무라자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동방예의지국'이 아니라 '세계예의지국'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희망을 조심스레 얘기해본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