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여전히 생소하게 다가오는 말 가운데 하나가 '초등학교'란 단어다. 1995년 8월 이후, 국내에서 '국민학교'란 명칭이 퇴출돼 초등학교라 개칭되었으니, 이 또한 20년 묵은 성어가 되었다. 그럼에도 장년이 된 늙다리 친구들과 만나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간혹 입에 발린 듯 국민학교 운운할 때가 더러 생기게 된다. 하기야 수십 년 써온 말을 단박에 바꾸려니 어색한 건 물론, 오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툭툭 내뱉듯 무의식적으로 쏟아내는 '그때는 그랬지' 대목에서, '그때' 앞에는 늘 '국민학교'라는 단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상소학교에서 보통학교로 불리던 것이 일제 강점 말기인 1941년 무렵, '황국신민의 학교'를 줄여 만든 것이 '국민학교'라는 사실을 이제는 모르는 이가 없다. 그렇다고 세뇌 당하듯 뇌까려온 이 단어가 머리 안에서 사라진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40년 넘게 샌프란시스코에 살다가 고향을 방문한 친구의 오랜 기억 속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검은 피부를 가진 친구였다. 한국인 어머니와 군무원이던 아버지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고 아버지를 닮아 체형이 무척 큰 친구였다. 그러나 아버지를 쫓아 한국을 떠난 지 40년이 넘었음에도 그녀의 무의식 저변에 돌출된 '국민학교' 발음은 매우 또렷했고, 일련의 '그때'들을 정확히 기억해 내고 있었다.

신흥초등학교는 일본인 소학교에서 출발해 광복 이듬해인 1946년이 돼서야 '신흥'이라는 정식 이름을 내걸고 인천 교육계에 첫발을 내딛은 학교였다. 인천 개항 무렵,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담당했던 동본원사 소속 승려들에 의해 창립된 것을 그 처음으로 치면, 꽤나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었다. 해방정국을 거쳐 한국전쟁을 치른 이후, 이른바 베이비부머의 시대라 불리던 시기에 신흥초등학교를 다닌, 지극히 일부지만 몇몇 학생에게는 평생의 특별한 기억을 담보해 주던 공간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나라로 떠난 그 친구들 전부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따뜻한 어머니의 품에서 성장판을 키워온 몇몇 친구들은 장년이 되어서도 노모를 찾는 회귀적덕(回歸積德)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 친구들 중의 하나가 '바니'였다.

바니는 상항(桑港)에 살고 있다. 알다시피 상항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북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샌프란시스코의 한자말이다. 상항이란 명칭을 유추해 보면 중국인들과 매우 많은 연관성을 가진 도시라는 점도 쉽게 파악된다. 다른 일면에서 보면, 인천과 매우 닮은 모양새를 띄고 있는 도시로 여겨질 때가 있다. 19세기 중반에 걸친 골드러시(Gold Rush)에 도시가 급격히 세워졌고 더 이상 금을 채취할 수 없게 되자 동부와 각국에서 온 이주민들이 어업과 금융 등을 기반으로 상공업에 발전의 발판을 둔 도시로 변모했다는 점이다. 제물포 항구도 그랬다. 인천 개항을 시점으로 전국의 민초들이 일거리를 위해 찾아들었고 서양 각국의 양행들이 할거해 도시가 급격히 성장하게 되는 배경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도시 성장에 따른 폐해 또한 비슷한 길을 걷지만 이를 해결해 내는 민주주의의 내공과 그 공력의 차를 느끼며 멀리 내다봐야할 숙제로 남겨야 하는 아쉬움은, 인천이 더 많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이면이 존재했다.

어쨌든, 바니는 배구 선수 생활을 접고 열심히 공부한 끝에 가정의학과 의사로서 생활하고 있다. 개항장 일대 굴곡 넘치는 언덕, 특히 조계지 계단을 돌아보며 '러시안 힐 Lombard st. (Russian hill)'를 연상시켰고, 월미도 앞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보며 황금색으로 물든 '골든게이트 브릿지 Golden Gate Bridge'를, 연안부두와 월미도 해안을 걸으며 피셔맨스 워프(Fisherman's Wharf)가 그려지듯 고향 인천 같은 푸근함을 느낀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태어난 곳,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동네 그리고 늘 반갑게 맞는 친구들이 있어 언제든 다시 와도 행복하다고 했다.
인천의 정체감은 어릴 적 친구 바니를 통해서 새롭게 반추되기도 했다. 인천을 시발지로 삼는 수도권 유수의 미군부대와 세칭 '양공주'로 대변하는 격변기 우리의 또 다른 어머니들. 눈과 피부색이 달라 커가면서 정체성의 혼돈을 가져왔고, 영문도 모르는 채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나라를 떠나야 했던 수많은 친구들의 존재 또한 인천 정체성의 일부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이러한 특별한 경험은 세대별 인식의 차이는 있지만 이국적이고 이질적인 것을 내면화 또는 포용하는 데에 적잖은 시간이 걸리기도 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밀물의 시간을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는 수 없이 많은 충돌의 늪을 건너야할 상황으로 변한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것이 인종적이든 문화적이든 간에 섞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과거 순혈주의와 백의민족 등을 주장하며 절대 권력을 고수해 백성을 지배해 왔던 전근대성은 혼미한 미래의 문을 열 열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한 만큼, 현재의 문제점을 극소화해 사람 그 자체를 살리는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향후 2020년 통계청 전망치에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20% 가량이 다문화 가정이 될 거라 예측되는 상황에서, 삶의 '섞임의 미학'을 진작부터 실현해 왔던 인천이 분명한 해법을 제시할 것으로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