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기획-대장경 '보문사' 연관 첫 확인>
'대장도감 중심 제작·보관' 증거 새로운 역사문헌자료 발굴 … 학계 관심
▲ 강화도 대장경판당에 팔만대장경 전질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케 해주는 <동문선>(東文選) 권68 기(記) 원본.
조선 시문선집 '동문선' - "진주 용암사 중창 뒤 부족한 대장경 강화서 인쇄" 기록
중국 서적 '사고전서' - 고려국대장이안기에 대장경 인본 강화 '보문사' 보관 명시

'팔만대장경'이 인천 강화도 '대장도감'을 중심으로 제작되고 보관된 사실을 재확인하는 역사 문헌자료가 나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조선시대 시문선집인 <동문선>(東文選)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와 중국 서적인 <사고전서>(四庫全書) '천하동문'(天下同文)의 '고려국대장이안기'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는 진주 영봉산 용암사를 중창한 뒤 빠진 대장경을 보충하기 위해 강화도에서 대장경을 보충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고려국대장이안기'는 팔만대장경 인본을 강화 삼산면 석모도 '보문사'에 보관했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오용섭 인천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문헌을 보여주며 "이 사료들은 팔만대장경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보관했었다는 피하지 못할 증거"라며 "인천시 차원에서 팔만대장경과 인천, 강화도와의 관계를 보다 심도 있게 연구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오 교수가 찾아낸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는 '대장경을 보충함에는 지난번의 염장 별감 이공과 방공이 별도로 임금의 명령을 받아 설전지 3만여 장과 칠을 담은 함 140여개를 만들어 받아 도왔다. 대사의 제자인 대선사 승숙·중덕 일생 등이 강화 장판한 집에 가서 빠진 함·권·장을 찍어 와서 신본과 구본을 합하여 도합 600여 함을 만들었는데, 모두 누런 비단으로 책갑을 만들어서 새 전당과 새 창고 안에 인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용암사는 지금의 '해인사'를 포함한 진양(진주) 지역에 있었으며 당시 해인사와 가까운 용암사를 중창한 뒤 대장경이 부족하자 빠진 함과 권을 강화에서 인쇄해 갔다"며 "그렇다면 최소한 용암사가 소장하던 대장경 가운데 빠진 권수만큼은 강화도에 있었다는 얘기"라고 밝혔다. 즉 부족한 부분을 강화도에서 보충해 갔다면 강화도가 팔만대장경의 완전한 질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고려국대장이안기'는 '철산화상이 돌아다니며 교화하시던 중에 강화도 '보문사'에 이르러서 대장경 3질을 보고 그 유래를 물어보니 두 질은 옛날에 임금과 신하가 안치한 것이고 한 질은 현재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군부판서 상호군인 허평과 서원군부인인 염씨가 바친 것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문사와 관련한 기록에서 팔만대장경이 언급된 내용이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이 는 보문사의 역사를 새로 쓰는 것과 동시에 선원사나 보문사 외 많은 사찰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거나 보관했던 것을 추정케하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왕조가 몽골과의 항전을 위해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이래 1236년~1251년 강화도에 설치한 '대장도감'을 중심으로 판각됐다. 8만여장이 판각된 뒤엔 강화 서문 뒤 '대장경판당'에서 150년간 보관하다 1398년(태조7년) 5월 용산강을 거쳐 지금의 합천 해인사로 이운됐다. 국보 제32호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