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봉 인천대 기초교육원 객원교수

보름 전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 아들이 1학기 생활통지표를 받아왔다. 시험 없는 학교 만들기가 실시되면서 성적을 매기는 성적표가 아니라 1학기 수업 활동 내용을 알리는 말 그대로 통지표였다.

수·우·미·양·가도 매우 잘함·잘함·보통도 표시되어 있지 않으니 우리 애가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을 잘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과도한 경쟁을 부추기는 것이 아이들 교육에 좋지 않다는 교육부의 방침 덕에 걱정은 부모의 몫이고, 아이들은 시험 없는 학교에 다니니 겉으로는 행복해 보였다.

시험 없는 학교의 취지는 아이들의 놀 권리를 주자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괴리가 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성공 메커니즘인 학벌주의가 없어지지 않는 한 아이들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 시험이 없어져 자유로울 것 같은 아이들은 부모의 재력에 따라 방학 스케줄이 다르다.

방학이 채 되기도 전에 어학연수를 받으러 미국에 가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선행 학습을 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하긴 학기 중에 놀았으니 방학에는 공부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어학연수도 학원도 보내지 못하는 부모의 속만 타들어 간다.

대학 입시를 위한 3대 조건은 재능, 능력, 노력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라는 우스갯말이 이제는 현실이 됐다. 바뀐 게 있다면 올 초에 방영한 드라마 'SKY 캐슬' 이후 아빠의 인맥이 추가됐다. 개천의 용이 사라진 지 오래다.

어학연수나 사교육 없이 학교 교육과 개인의 노력만으로 소위 SKY라 일컬어지는 명문대에 입학하기란 이제 불가능해졌다. 영어 유치원, 사립 초등학교·중학교를 거쳐 특목고를 가야만 명문대를 간다는 공식은 깰 수가 없다. 그러니 교육부의 방침을 비웃듯 사교육 연령대는 점점 낮아지고 부모의 재력은 더욱 강조된다.

며칠 전 서울신문이 1980년대생과 1990년대생 604명에게 "우리나라에서 학생이 대학에 들어가거나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적어 보라"는 설문조사를 했다. 1990년대생 312명 가운데 221명(70.8%)이 '돈, 재력, 집안 환경, 재정적 지원' 등 경제력과 관련된 단어를 적었고, 개인의 능력(66명)이나 적성(21명)을 적은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대한민국 성공의 척도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부모의 재력이 되어버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세습은 당연하다. 게다가 사유재산의 신성불가침적 권리를 주장하는 자유 지상주의가 대두되면서 재산은 재능이나 노력보다 중요해졌다.

몇 해 전 "돈도 실력이야, 너희 부모를 원망해"라는 말로 공분을 샀던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의 말은 이땅의 젊은 가슴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그 정도만 다를 뿐 부모의 재력에 기대어 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불편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 된 것이다.

부유하게 태어난 건 행운이고 이 행운을 누리는 건 자유다. 하지만 행운을 실력으로 착각하고 타인이 가난을 무능으로 규정하는 건 잘못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이 잘못에 무감각해졌다. 비정상이 정상이 된 것이다. 바꿔보겠다고 촛불도 들었고, 정권도 바꾸었지만 갈 길이 멀어서인지 여전히 가난한 부모만 원망한다. 아니 바뀌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자신의 신념을 바꾸고 있는 지도 모른다. 공정한 경쟁을 원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공자는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삶을 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면의 자신감이 충만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부모의 재산이 곧 나의 자신감이고, 나의 실력이고, 나의 재능이다. 내면의 자신감은 돈으로 만드는 것이지 자신을 닦는 공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안다.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이생망'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도 결국 이 사회가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 최소 수혜자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자"는 존 롤스식 정의나 "가난한 사람을 두루 도와주고 부자를 더 부자가 되게 하지 말자(周急不繼富)"는 공자의 말로 세상을 바꿔보자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할 때 소수의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고통 받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익을 보았다면 더 큰 이익을 원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나눌 것인지, 진정한 '견리사의(見利思義)'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