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실크로드를 가다] 6. 송나라 주재 고려대사관닝보 고려사행관
▲ 닝보 고려사관 안에 있는 비석. 이 비석에는 고려사를 설립하고 고려사신을 위한 선박을 건조하라는 송나라 황제의 명이 기록돼 있다.

 

▲ 닝보박물관에는 송나라시대 명주항의 모습을 재현해 놨다.

 

▲ 닝보에서 발견된 고려청자와 파편들. 현재 닝보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는 송나라 시대 명주성을 재현한 지도를 볼 수 있다. 월호 인근에 관청과 시박사, 고려사관, 파사관 등이 차례대로 위치해 있다.

 

▲ 닝보 시내에 위치한 당나라 시대 건설된 인공호수 월호의 모습.

 

 


송나라 시절 명주 '지금의 닝보'

당나라 건설 인공호수 '월호'로

해상 실크로드 중심 국제무역항

고려사관, 宋 휘종 지시로 지어

벽면 큰 그림엔 교류 모습 담겨

장보고 개척 벽란도 - 닝보 항로

거란 침략당한 宋의 출발 항구로


올 여름 중국 닝보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뜨거웠다. 한낮 온도가 40도에 육박했고 높은 습도로 탐사팀의 앞을 가로막기도 했다.

송나라 시절 명주, 원나라 시대 경원이라 불리던 닝보(寧波·영파) 는 오래된 고대 국제무역항이다. 닝보 시내에 위치한 월호(月湖)는 당나라 시대 건설된 인공호수로 고대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호수 주변으로 오래된 건물들이 여럿 들어서 있다. 송나라 시대에는 호수를 중심으로 성곽이 둘러싸고 있었다. 성안에는 명주관청과 무역을 관장하는 시박사, 고려사신과 상인들의 숙소인 고려사행관(줄여서 고려사관이라 불린다), 아라비아 상인들의 숙소인 파사관, 국제 무역거래소, 각종 상가 등이 모여 있었다.

닝보는 지리적으로 융강과 펑화강, 요강 등 대륙의 운하와 바닷길이 만나는 물류 요충지였다. 남송 수도가 인근 항저우로 옮기면서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취안저우와 광저우가 중계 무역항 성격이 강했다면 닝보는 내륙의 생산지와 운하로 연결된 생산과 유통이 결합된 국제 무역항이었다.

먼저 호수 동쪽 고려사관을 찾았다. 건물 앞 고려 사관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왼쪽에 송나라 황제의 지시로 고려사관을 건립했다는 비석이 서있고, 벽면 전체에는 고려와 송나라 시절 사신과 상인들의 교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커다란 그림이 자리하고 있다. 멀리 고려에서 오는 무역선과 명주항에 짐을 내리는 장면, 고려 사신단을 맞이하는 송나라 관리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고려사관은 송나라 정부가 먼 길을 온 고려 사신을 위해 지은 국가급 영빈관이다. 사실상 오늘날의 대사관과 비슷하다. 영문소개도 'KOREAN EMBASSY'로 표시하고 있다.

닝보는 당나라 때부터 신라와 무역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장보고가 활동했던 무대이기도 하다. 가장 오래된 항로인 황해 연안노선의 주인공이었던 화성 당성과 중국 등주는, 고려와 송나라로 넘어오며 벽란도와 닝보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황해 해상세력의 후예인 왕건이 고려 건국하면서 개경과 가까운 벽란도가 새로운 국제무역항으로 부상한다. 송나라도 거란이 요동반도 일대를 점령하자 연안항로와 황해횡단항 대신 장보고가 이미 개척했던 명주와 벽란도를 직접 잇는 황해 사단항로를 대안으로 선택했다. 이에 명주가 송나라 시기 고려, 일본 등으로 나가는 해외무역의 유일한 합법적 출발 항구가 됐다.

1117년 명주 태수는 송나라 휘종의 뜻을 받들어 명주에 고려사를 설립해 고려와의 교류에 관한 정무를 관리했고, 도시 입구에 국가급 영빈관인 고려사관을 건립했다.

고려사신단을 맞는 시설은 이미 북송시대부터 주요 무역항에 생겨났다. 북송 초기에는 등주에 고려 사신들의 전용 관사인 고려관이 있었고, 수도인 개봉에도 동문관을 만들어 고려사신을 머물도록 했다. 당시 송나라와 고려 양국 간 사신왕래는 상인들도 대거 참여했기에 이들이 갖고 온 수많은 화물을 저장할 곳과 쉴 곳이 필요했다. 고려사관은 이런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닝보 고려사관은 규모가 상당히 컸다. 사신과 상인의 휴식처뿐 아니라 숙식과 간단한 업무를 볼 수 있는 기관도 마련되었고 화물 저장소와 거래소 등도 있었다.

사실상 오늘날 대사관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현대적인 의미의 치외법권이 없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고려사관의 호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설립 13년 뒤, 금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면서 화려한 관사가 불에 타 소실됐다. 다행히 송을 이은 원나라는 해상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한중간의 해상 실크로드는 단절되지 않았고 다시 명주는 대 고려 무역항구로 살아났다. 그 증거가 바로 신안 보물선이다. 닝보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고대부터 지금까지 국제적인 항구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컨테이너 처리실적을 보면 닝보·저우산항은 지난해 부산항을 제치고 세계 4위의 국제무역항으로 부상했다. ▲인천일보 해상실크로드 탐사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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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닝보 앞바다 보타도 가는 길에 만난 '신라초'의 모습
▲ 닝보 앞바다 보타도 가는 길에 만난 '신라초'의 모습

 

신라초(新羅礁)와 고려도두(高麗道頭)

암초 만난 배, 관음상 올려 놓으니 나아가 

신라초, 이후 항해하는 선박 복 비는 장소로

닝보와 벽란도간 무역은 얼마나 활발했을까.

닝보 앞바다 저우산 군도에는 여러 섬들이 있다. 이곳은 고대 한중 해상교역로의 가장 중요한 길목이었다. 수많은 신라와 고려 상인들이 이곳을 드나들었다.

그 중 보타도에는 신라초와 고려도두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었다. 두 곳 다 고대 한·중 해상교통로의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흔적을 찾아 보타도로 향했다. 닝보 여객터미널에서 보타도 가는 배에 올랐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암초가 보인다. 이 암초가 바로 '신라초'다.

이름의 유래는 송나라 사신단의 고려방문기를 담은 '고려도경'에 소개돼 있다.

"옛날 신라 상인이 중국 오대산에 가서 관음상을 조각해 본국으로 돌아가려다 암초를 만나 배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암초 위에 관음상을 도로 올려놓은 후에 갈 수 있었다. 이후 항해하는 선박은 반드시 이곳에 이르러 복을 빌었는데 감응하지 않는 때가 없었다"

얼마나 많은 신라인들이 이곳을 왕래했으면 암초에 '신라'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고려도두는 고려에서 매년 공물을 실은 선박이 닝보 앞바다에 정박하던 곳이다. 지금은 개발로 인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인근에 고려인이 세운 사찰과 신라촌, 고려촌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수많은 고려 사람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해상 무역활동을 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을 다녀간 인물로는 고려의 왕자로 송에서 불법을 탐구한 대각국사 의천과 중국 천태종을 다시 일으킨 의통이 대표적이다.

제주도에서 풍랑을 만나 닝보로 표류한 내용을 기록한 조선선비 최부의 표해록과 원나라때 닝보에서 출항해 신안 앞바다에서 좌초한 선박도 그 증거이다. 송나라 사신의 고려 방문기인 '고려도경'의 출발지도 닝보다.

주요 교역품으로 고려는 금·은·나전칠기·화문석·인삼 등을 수출했고, 비단·서적·도자기·약재 등을 수입했다. 중국은 이들 물품에 관세를 붙이기도 했는데 5.2~6.7% 정도로 다른 나라의 4~10%와 큰 차이는 없었다.

닝보박물관에는 신라 고려와의 해상 무역에 대한 각종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있다. 신라초와 고려도두에 대한 자료는 물론 13세기 고려청자도 볼 수 있다. 고려와의 국제무역 내용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962년 고려국 사신이 온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교류가 이어졌고, 1038년에는 명주상인 147명이 태운 대규모 무역선이 고려로 향하기도 한다. 양국 간 교역이 활성화되며서 1090년에는 고려 사신과 상인 269명을 태운 배가 명주에 도착했는데 역대 최다인원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1139년에는 한 해 동안 총 4차례에 걸쳐 명주 상인 327명이 고려무역에 나섰다.

명주 인근도시인 임해에서도 1031년과 1038년에 두 차례 임해 상인 수백명이 무역선을 타고 고려를 왕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식적인 기록이외에도 수많은 상인들이 닝보와 벽란도를 오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