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설한 황무지로 뿔뿔이 … '눈물의 열차'는 달렸다
▲ 중앙아시아 고려인 이주의 시발역인 아리스역.아리스역에는 20여개의 철도라인이 각종 화물차량들로 겹겹이 줄지어 있다.
▲ 중앙아시아 고려인 이주의 시발역인 아리스역 전경.
▲ < 발굴자료> 아리스역을 거쳐 우즈벡 각 지역으로 출발한 고려인 이주 현황.

연해주떠나 아리스역 거쳐 각지 수송

자료와 달리 11월말에도 이주는 계속

스탈린 명령으로 강제이주 자료 발굴

A4 에 출발역·일시 기차번호 등 기록

1937년 8월 21일, 스탈린의 명령으로 시작된 연해주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의 정황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발굴됐다.

그동안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졌지만 구체적이고 총괄적인 내용보다는 일반적이고 단편적인 내용들이 많았다. 실제적인 연구들도 대부분은 증언자들의 녹취록과 회상자료에 근거하였다. 이를 보다 확실하게 뒷받침해 줄 자료들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구 소련의 연방정부는 자료들을 모두 기밀문서로 처리하였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급박하고도 비밀리에 처리할 필요가 있는 중차대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취재팀이 발굴한 자료는 1937년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당시, 고려인들을 연해주에서 당시 우즈벡자치공화국의 각 지역으로 배정한 단서를 제공하는 중요한 문건이다.

총 A4용지 3장 분량으로 작성된 이 보고서에는 연해주 고려인들의 출발역과 역장, 기차번호 및 출발일과 출발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중간 기착지인 아리스역 도착일자와 시간 및 우즈벡 각 지역으로 출발하는 현황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자료는 1937년 11월14일에 작성됐다.

표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연해주에서 고려인을 태우고 출발한 기차역은 블라디보스톡, 하바로브스크, 예브겐엡카 등 모두 25개 역이다. 이 25개 역에서 총 54회의 기차가 출발했다.

최초의 출발일은 9월10일 라즈델나야 역이고, 마지막 출발일은 10월 20일 에게르쉘드 역이다.

연해주의 각 지역에서 출발한 열차들은 20일 정도 걸쳐서 아리스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많게는 이틀 정도의 대기시간을 거쳐 우즈베키스탄의 각 지역으로 수송됐다.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나망간, 안디잔을 비롯해 아랄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이다.

아리스역에서 마지막으로 출발한 열차는 11월11일 오전 9시55분, 우르타아울행 602호 열차다. 고려인들을 제일 많이 이주시킨 곳은 타슈켄트 주와 아랄해 인근지역이다.

스탈린은 일본의 간첩활동 방지를 위해 극동지역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다고 하였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고려인 자치주 설립의 두려움, 민족적 역량이 강한 고려인들의 분산정책 등 다른 이유도 있다.

하지만 발굴자료를 살펴보면 고려인들이 이주된 지역은 대부분이 황무지였다. 개간이 필요한 불모지역이다.

고려인들은 이미 연해주의 불모지를 개간해 옥토를 만들고 벼농사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스탈린 정부의 고려인 강제 이주는 정치, 사회적인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중앙아시아 식량생산의 확대 필요성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리스역은 1904년에 건설됐고 중앙아시아의 출입국이라고 불렸다. 이는 아리스역이 유럽과 시베리아, 우즈벡과 카스피해 및 키르기스, 극동을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역은 쉼켄트의 북서쪽, 자동차로 1시간 30분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아리스역에 도착한 탐사팀은 역의 규모에 놀랐다. 20여 개의 철도라인이 각종 화물차량들로 겹겹이 줄지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역은 오늘도 중앙아시아 철도의 중심지라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자료를 발굴한 취재팀의 허우범 작가는 "스탈린 체제의 공식문서에는 고려인 이주사업이 1937년 10월25일 완결됐다고 하지만 이 자료를 살펴보면 강제이주는 11월말까지도 계속된다"고 밝혔다.

스탈린이 지시한 이주 고려인들에 대한 자산가치의 보상, 이주지역에 대한 불편 해소 등은 지켜지지 않았다. 형식적인 겉치레에 불과했다. 인민의 적으로 인식되던 고려인들에게 약속이나 편의는 애당초 불가능했다. 한 달 이상 지연된 이주기간, 엄동설한의 황무지에의 정착 등이 이를 잘 알려준다.

허 작가는 이 자료의 가치를 "고려인들이 수송되고 이주된 날짜와 장소를 사실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며 "전격적이고 급박하게 이뤄진 강제이주는 상부보고와는 다르게 겨울철까지 이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고려인들이 겪은 수난은 말할 수 없이 컸다"고 말했다.

-------------------------------------------------------------------

허우범 작가가 말하는'발굴자료의 가치와 의의'

"연해주 한인, 소비에트 통합정책에 희생"

스탈린, 국유화 불만 잠재우려 소수민족 간첩 내몰아

"자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때 가슴이 멎는 듯 했습니다"
허우범 작가는 지난 2012년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답사 중에 이 자료를 발견했다.

허 작가는 2004년부터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며 '까레이스키'로 불리는 고려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다. 고려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삶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던 중에 본 자료를 입수하게 됐다.

허 작가는 자료의 중요성을 알고 곧바로 이를 언론을 통해 알리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고려인들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지 않았던 정책과도 관련이 있었겠지요"

허 작가는 대신 직접 현장답사를 통해 이 자료를 검증하기로 했다. 그리고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이 되는 올해 취재팀에 참여했다. 허 작가는 "스탈린은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전면적인 국유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소련 인민들을 잠재우고 통합하기 위해 국경지역에 거주하던 소수민족들을 '간첩'으로 몰아 세웠다"면서 "일본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이 스탈린의 소비에트 통합 정책의 '도구'로써 희생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료에 대해 복기대 인하대 사학과 교수는 "이 문서는 정확한 이동인원이나 정착지 도착일자 등이 빠져 있지만 당시 고려인들의 강제이주가 공식기록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음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며 "강제 이주 80주년을 맞이해 보다 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이에 근거한 연구와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기를 바란다"고 평가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특별취재팀
/카자흐스탄(아리스)=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
/경기문화재단 후원